허재 KCC 감독은 이달 초 정몽익 구단주의 긴급 호출을 받았다.
서장훈 임재현을 영입한 데다 수준급 외국인 선수 두 명을 선발하고도 3승 4패로 헤매던 때였다. 우승 후보라는 예상과 달리 고전을 거듭하면서 허 감독은 흰머리가 늘어만 갔다.
허 감독은 정 구단주의 용산고 후배로 학창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긴 했어도 나쁜 상황에서 대면하니 ‘어떤 꾸지람을 들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정 구단주는 “내가 선수들을 바꿀 수는 있어도 너만은 버릴 수 없다. 길게 봐라”며 무한한 신뢰감을 표현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힘을 얻은 허 감독은 ‘슬로 스타트’에 대한 조급증에서 벗어나 여유를 되찾고 팀을 이끌 수 있었다. 스타 출신 지도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선수들에 대한 불신감을 떨쳐 내고 주전과 후보를 가리지 않고 믿고 기용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정훈 신명호 등 식스맨을 중용하면서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프로 원년 나래 시절부터 TG에 이르기까지 구단 프런트로 잔뼈가 굵은 최형길 KCC 단장 역시 구단과 코칭스태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자처하며 물심양면에 걸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과 프로 무대에서 지도자로 오랜 경험을 쌓은 장일 전 중앙대 감독을 스카우트로 새로 기용해 전력 분석을 맡겨 다양한 전술 구사가 가능하게 했다.
그 덕분인지 KCC는 지난 주말 시즌 팀 최다인 4연승을 달리며 9승 6패로 공동 3위까지 올라갔다. 무엇보다 끈끈해진 수비가 돋보였다. 최근 4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득점은 78.8점으로 시즌 평균(82.3점)보다 낮았으나 실점은 시즌 평균(81.1점)보다 10점 이상 떨어뜨려 70.8점을 기록하고 있다. 화려한 공격보다는 팀워크와 근성이 요구되는 수비에 치중한 결과다.
그래도 허 감독은 “내가 뚝배기에 담긴 음식을 좋아한다. 우리 팀은 화끈하게 달아오르려면 아직 멀었다”며 웃는다. 특유의 입담이 살아난 걸 보면 벤치를 지키는 그의 자신감도 살아난 듯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