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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유윤종]정치선진국과 정당재단

입력 | 2007-12-05 03:02:00


“10년 만에 독일에 가 보니 동네도 그대로, 하숙집 아주머니도 그대로시더군.” 해외여행이 잦지 않던 1980년대, 학술회의 참석차 모처럼 독일의 모교를 찾았던 교수님의 얘기였다.

“8시 뉴스를 보려고 TV를 틀었더니 옛날 앵커가 머리만 허예진 채 나오는 거야.”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열흘 만에 서울 집에 돌아오니 골목 앞에 못 보던 건물이 서 있더라고.”

‘다이내믹 코리아’에선 모든 것이 빨리 바뀐다. 얼마 전에는 창당 10주년을 맞은 정당이 한국 정치사에서 세 번째 장수를 기록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반면 ‘전통’과 ‘연속성’을 중시하는 유럽은 정당의 역사도 길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사민당)이 탄생한 해는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기도 전인 1863년.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과 자유민주당 등 기타 주요 정당도 독일연방공화국 성립과 출생시기가 비슷하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어 낼까. 정당을 인당(人黨)으로 보지 않고 인물보다 정책 위주로 투표하는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꼽을 수 있다. 1999년 기민련 소속의 헬무트 콜 전 총리가 비리 의혹에 연루되자 앙겔라 메르켈 당시 사무총장을 비롯한 당 조직은 재빨리 그의 정계 퇴진을 촉구하며 ‘꼬리’를 잘랐다. 16년 동안이나 총리를 지낸 콜이었지만 ‘자신의 당’을 만들지는 못했고 민심 앞에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숙된 정치문화를 만들어 낸 동인은 무엇인가. 독일인들은 정치적 안정성과 높은 시민참여 의식의 원천으로 이 나라 특유의 ‘정당재단’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정당은 정책의 인기가 높아지도록 ‘투쟁’하는 것이 임무죠. 반면 정당재단의 임무는 시민들이 정책에 대해 숙고하고 가치를 인식할 힘을 심어 주는 데 있습니다.” 최근 방한한 기민련 계열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의 로타르 크라프트 전 사무차장은 이같이 설명했다. ‘계열’이라고 말한 것은 정당재단이 정당의 ‘산하기구’가 될 수 없도록 이 나라의 법령이 엄격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나 자민당의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녹색당의 하인리히 뵐 재단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공통적으로 학생과 교사,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민주정치 교육’이 최대 역점사업이다. 에버트 재단은 노사문제, 뵐 재단은 환경문제에 큰 노하우를 갖고 있다. 재원의 대부분은 각 정당이 아니라 연방 의회에서 나온다. 정규 프로그램 외에도 잦은 학술회와 강연회로 시민들을 만난다.

크라프트 전 사무차장은 이 같은 재단들이 제도화된 동기를 ‘과거 나치 독재를 용인했던 아픈 경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은 민주공화국이었지만 결국 민주적인 시민을 양성하지 못했죠. 이런 실수를 독일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한국에도 국고 보조로 시민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독일형’ 정당재단 제도를 도입하자고 제안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렇지 않아도 제구실 못하는 정당들에 혈세를 퍼붓는다’는 비난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국민이 민주제도의 본질과 각 정당의 정책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그에 따라 여러 선거에서 ‘인물’보다 자신의 진정한 이득을 꼽아보고 현명한 투표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국가의 미래를 위해 훨씬 득이 많을 일 아닐까.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