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빈민가 출신 아이에 대한 연민 때문에 이야기를 지어내고…. 나한텐 안 통해요. 그 애는 유죄요.”
B: “댁이 사형 집행관이오?”
A: “그렇소.”
B: “직접 (전기) 스위치를 누르겠다? 처음부터 정의의 사도인 양 떠들어 대더니…. 사적인 감정으로 이 애가 죽기를 바라는 거요?”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란 미국 법정영화에서 배심원 2명이 다른 배심원들 앞에서 피고인의 유무죄를 격렬히 다투는 장면이다. 아버지에게 상습 폭행당한 18세 소년이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혐의(1급 살인)로 기소된 사건. 뚜렷한 알리바이는 없고, 두 명의 증인이 있으며, 변호사도 포기해 버린 ‘뻔한 사건’이다. 유죄로 결론 나면 판사는 소년에게 그대로 사형을 선고하게 된다. 소년은 멸시받는 히스패닉이고 배심원은 백인 일색이다.
11명의 배심원은 빨리 ‘유죄’로 평결하고 귀가하길 원하는데 딱 한 사람이 ‘무죄’ 가능성을 주장한다. “단 5분 만에 18세 소년의 생사가 좌우되는 건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는 이유에서다.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정당한 의심은 바이러스처럼 점점 두 사람, 세 사람, 결국 전원에게로 퍼져 간다.
1940년대에 영국의 유명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불륜 관계였던 여인의 딸에게서 친자식임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당했다. 요즘 같으면 유전자(DNA) 검사로 금세 확인되겠지만 그때는 혈액형 검사밖에 없었다. 채플린은 O형, 어머니는 A형, 딸은 B형으로 나왔다. 채플린의 자식일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채플린과 원고의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친아버지가 맞다고 평결했다. 혈액형을 참고자료로만 쓰던 시절의 얘기지만 배심원들의 오판(誤判) 사례로 지금도 인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새해 1월 1일부터 ‘국민 참여 재판’이라는 일종의 배심제가 시행된다. 그제 법무부와 한국법학원이 주최한 관련 심포지엄에선 아직도 준비가 멀었다는 점이 부각됐다. 판사가 혐의 내용의 사실 여부와 양형(量刑)에 관한 배심원들의 평결(評決)을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큰 영향을 미치게 돼 있는 배심원들의 수준이 걱정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9월 모의재판에 참여했던 배심원 30명을 상대로 한 대법원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그런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보여 준다. 평의(評議)가 시작되기 전에 사건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했다는 배심원은 58%였고, 나머지는 거의 또는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배심원 후보자 가운데 직장인은 10%에 불과했다. 90%는 고령의 퇴직자, 학생, 주부, 무직자 등이었다.
개인적 감정의 개입, 증거 판단 능력의 부족, 적법 절차에 대한 낮은 인식, 언론에 노출되는 데 따른 편견과 선입견 등도 난제에 속한다. 가령 피고인의 좁은 이마, 주걱턱, 문신 등 신체적 특징에 편견이 작용한다면 불리한 평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자칫 잘못 운영하면 ‘배심원에 의한 인민재판’으로 흐를 소지도 있다. 배심원이 뇌물을 받는 경우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것도 허점이다. 요컨대 배심원의 공정성과 객관성 중립성을 높이는 일이 성패(成敗)의 관건이다.
배심재판은 피고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열리기 때문에 섣불리 실시한다면 과거 일본의 배심제(1927∼1943년 시행)처럼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