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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심규선]에리카 김, 에리코 김

입력 | 2007-12-06 02:56:00


에리카 김의 본명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찾아보니 김미혜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김미혜는 몰라도 에리카 김은 안다. 그동안 그 가족들이 주장한 내용은 검찰 수사에서 모두 거짓이거나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가 미국식 이름으로 불리고, 부르고, 보도하는 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도덕성을 그렇게 귀히 여기는 우리가.

에리카 김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는 언론에 등장할 때 미국에서 쓰고 있는 이름으로 소개된다. 아마도 그들에게 “한국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 미국 이름 뒤에 킴, 리, 팍, 초이라는 한국 성만 붙어 있으면 오케이다.

해외동포도 사는 곳 따라 차별 받는다

문제는 그런 룰이 모든 해외동포에게 적용되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재일동포에게는 그렇지 않다. 상당수의 재일동포가 귀화 여부에 상관없이 일본 이름(통명·通名)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서, 또는 한국인에게는 절대로 통명을 쓰지 않는다. 이유는 우리가 더 잘 안다.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명문대를 졸업하고 법학박사에 변호사 자격증까지 딴 재원이 있다고 치자. 여기까지는 에리카 김과 같다. 그러나 이 재원이 일본에서 ‘에리코 김’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활동한다면 ‘에리카 김’과는 달리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뿌리’를 잊어버린 한국인이라고.

이런 차별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재일동포들이 우리를 식민통치했던 일본 땅에 살고 있다는 이유밖에 없다. 그러면 그게 그들의 잘못인가. 아니다. 그들은 못난 조국을 만난 잘못밖에 없다. 그런데도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넓고도 깊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런 차별을 의식한 적도, 고민해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재미동포가 시민권을 얻으면 축하를 받는다. 재일동포는 귀화하면 눈총을 받는다. 미국의 한국계가 미국인과 결혼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한다. 일본에 있는 한국계가 일본인과 결혼하면 “그 수밖에 없었느냐”고 꼬집는다. 미국에서 태어난 꼬마가 영어를 하면 못 알아들어도 “귀엽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가 일본어를 쓰면 “부모는 뭐 하느라 한국말도 안 가르쳤느냐”고 한다.

재일동포의 뿌리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거나, 먹고살기 위해 맨주먹으로 건너간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재미동포는 스스로 이민을 가거나 원해서 눌러앉은 사람들이 주류다. 양쪽 다 차별을 얘기하지만, 어느 쪽이 더 차별받고 살아왔는지는 논쟁이 필요 없다. 재일동포의 모국 사랑도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정도다. 누가 모국으로부터 더 따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해답이 자명한데도 현실은 정반대다.

재일동포는 한국에 와도 늘 긴장하게 된다고 말한다. ‘책잡히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고통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 재일동포에 대한 무의식적인 차별은 이제 의식적으로라도 그만둬야 한다.

이젠 재일동포도 넉넉히 품어야 할 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성공한 재일동포들의 꿈은 자식을 한국의 대학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이 넓어져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신세대 자식들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 한번 왔다 간 젊은이들은 어딜 가나 유창한 한국말과 철저한 한국식 예의를 강요받고 좌절한다. 한국에 와 보지 않은 젊은이들은 그런 얘기만 듣고도 좌절한다. 그리고 모두들 한국에 대한 동경을 접는다.

8년 전인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을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한 간부가 물었다. “우리 재일동포 사회에서 뭐 고칠 건 없습니까.” 이렇게 대답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 간부는 “왜요, 뭐 불만이라도 있습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다시 대답했다. “아니요, 일본에 오기 전까지 재일동포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서 재일동포를 홀대할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