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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가슴에 대못을 박은 죄

입력 | 2007-12-06 19:58:00


그럴 줄 알았다. BBK ‘의혹’에 대해 검찰이 어떤 발표를 내놨대도 ‘진 쪽’은 어떻게든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살아남을 방도가 없다는 현실도 이해한다. 설령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대도 공수(攻守)만 뒤바뀔 뿐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공산이 크다.

어차피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돼 있다. 믿고 싶은 사실이 안 나오면 일말의 건더기라도 걸릴 때까지 한사코 부인한다. 심리학 용어로는 인지적 편견이라고 한다던가.

“그놈이 그놈”인 환멸의 정치

어떻게 똑같은 내용인데 한쪽은 인정하고 다른 쪽은 절대 인정 안 하느냐며 헷갈릴 것도 없다. 같은 정보를 놓고도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다는 미국의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선거에선 뇌의 이성을 관장하는 부분은 조용한 반면 감정을 관장하는 부분만 들끓는다. 이 때문에 정치판은 화끈한 강경파가 득세하고 갈등과 파국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그래도 참여정부 총리로 ‘시스템 정부’를 자랑했고, 김대중(DJ) 정부에선 교육부 장관으로 학력 낮은 ‘이해찬 세대’를 낳았으며, 그 10년의 영화를 더 누리겠다고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몇 번씩 단일화 쇼를 하고도 낙마해 지금은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해찬 씨가 5일 “검찰 권력과 위장의 달인 이명박 후보가 유착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외친 건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를 울린 일이었다.

자칭 민주평화개혁세력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유린해 왔는지 알려면 헌법재판소까지 갈 것도 없다. 비행기에서 만취 난동을 부려 국민과 기업의 금쪽같은 돈과 시간을 앗아간 대통령 후원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최근 행각이 참여정부 5년을 압축 상징한다.

그는 5년 전 대통령의 ‘좌희정’ 안희정 씨에게 용돈이라며 7억 원을 집어 줘 유죄를 받은 인물이다. 셋째 딸은 ‘우광재’ 이광재 전 대통령국정상황실장 덕에 청와대 직원으로 뽑혀갔고 국세청에 근무하던 사돈은 국가보훈처 차장으로, 처장으로 승승장구했던 참여정부판 부원군이었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경찰은 비행기에서 내려져 의전실에서 쉬고 있던 박 회장에게 “화를 삼키라”고 달래기에 급급했다니 이 정권의 속성이 이보다 잘 드러날 순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우리나라가 다이내믹 코리아이고 우리 국민에겐 압축적 학습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 정권과 거기서 이름만 바꾼 정권 계승세력에 민심이 등 돌린 것도 이 때문이다. 도덕성에선 한 점 부끄럼이 없다던 자칭 민주화 세력도 부패할 기회를 못 만났을 뿐이지, 정권만 잡으면 그들이 비난해 온 수구부패동맹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놈이 그놈’일 바엔 그래도 뭘 좀 아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노무현과 386정권이 박살낸 건 인간에 대한 신뢰만이 아니다. 기자실 대못질보다 용서 못할 이 정권의 잘못이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죄다. 수십 년 가슴에 품고 살았던 민주주의에 대한 꿈과 이상까지 배신을 한 것이다.

권력에 속지 않는 현실적 방법

정치인에게 집권보다 중요한 건 저희들 밥그릇이 달린 총선이며, 권력을 위해서라면 우리 국민과 16개국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자유민주주의까지 깨부술 수 있음을 그들은 부끄럼도 없이 노골적으로 보여 줬다. 덕분에 나라와 민족,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어느 누구의 결단에도 다시는 감동할 수 없을 것 같다. 잃어버린 5년, 10년보다 내겐 이게 더 억울하다.

그나마 이 정권이 고마운 건 더는 권력에 속지 않을 면역력을 길러 줬다는 점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뛰게 마련이고 이 점에선 인간으로 구성된 정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럴 바엔 제 돈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척, 세금 뜯어 국민 삶에 시시콜콜 간섭하며 부귀영화를 즐기려는 대통령보다는 ‘작은 정부’ 공약을 내건 쪽이 훨씬 낫다. 이상한 대입제도로 미래세대의 학력(學力)은 낮추고도 전 국민의 학력을 높인 점에선 과연 성공한 정부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