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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구효서]소설가의 이름 짓기

입력 | 2007-12-08 03:01:00


명색이 작가이다 보니 종종 ‘작명’을 부탁받곤 한다. 작가란 무언가를 지어내는 직업이니 사람들에게서 작명을 부탁받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소설을 쓰다 보면 아닌 게 아니라 작명에 고심하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뿐 아니라 사소한 역할의 등장인물에게도 일일이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한다. 이름 없는 사람은 없는 거니까.

20년 내리 스물다섯 권 정도의 소설을 썼으니 내가 지어낸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사람 이름뿐이겠는가. 소설에서는 지명, 회사명, 건물명, 심지어 외국인 이름과 인터넷 ID까지 지어내야 한다. 그러니 어쩌면 웬만한 작명가보다 많은 이름을 지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에서의 이름 짓기와 실생활에서의 이름 짓기는 그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부여받는 등장인물의 이름은, 그것으로 어느 정도 인물의 성격과 품성과 운명 따위를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실생활에서의 이름 짓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작가는 사람과 회사와 건물의 실제 운명을 점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용도와 효용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것의 이름이란, 다른 어떠한 것의 이름과 변별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영철아!”라고 불렀을 때 열 사람이 동시에 뒤돌아본다면 이름으로서의 효용이 없다. 그래서 ‘다른’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란 문자(文字)가 발견되기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니, 의미기호 이전에 음성기호였다. 부르기 좋고, 듣기 좋고, 기억하기 좋되 다른 이름과 차별되는 이름이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자 없는 현대생활을 상상할 수 없듯이 이름에도 뜻이 중요해졌다. 뜻글자인 한자 문화권에선 더 그러한 데다 요즘은 의미 있는 외국어로 이름 짓는 게 유행이 되어 버렸다. 그 많은 잡지, 그 많은 아파트, 그 많은 자동차들의 이름을 보라. 부르고 외우기도 힘들지만 뜻을 알아내기도 힘들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름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이른바 작명 원리에서는 사주와 음양오행과 한자의 획순까지 꼼꼼하게 따진다. 작가라고 해서 적당히 이름을 지었다가는 선무당이란 소리 듣기 십상이다.

어째서 그토록 이름의 의미에 구애받는 것일까. 이왕이면 ‘잘될’ 이름을 갖고 싶어서일 것이다. 적어도 ‘부정 탈’ 이름은 피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름에다 명운을 걸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사람들의 심정을 모를 바 아니다. 성공과 출세, 무탈과 평안에 대한 간절한 기원과 소망이 이름에 오롯이 담기길 바랐던 것이다.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으로 길게 이어지는 이름이나 ‘개똥이’ ‘돼지’라는 이름에서도 절박하고 간절함이 읽히기는 매일반이다.

그러나 기원과 소망, 요구와 바람 중에도 으뜸인 것이 있다고 한다. 욕심과 욕망을 버리기를 기원하는 기원만큼 좋은 기원은 없다는 말이 있다. 평생을 함께할 이름에 지나친 출세간의 무거운 의미를 담는 것은, 자칫 그 소원이 욕심과 욕망으로 기울게 할 수도 있는 것. 역시 이름은 기원의 의미나 소망의 뜻이 아니라 부르기 쉽고 듣기 좋고 기억하기 쉽되 다른 이름과 차별되는, 소리글자여야 할 것 같다. 이미 많은 아이가, 많은 회사가, 많은 건물이 그런 이름을 갖고 있다. 설령 거창한 이름을 갖고 있더라도 그 무게에 얽매일 일이 아니며 지나치게 소박한 이름이라 여겨 멋쩍어할 일도 아니다. 필자의 ‘효서’라는 이름도 의미를 가진 한자 조합이긴 해도 어차피 뜻을 새겨 부르고 듣고 외우는 사람은 없다.

구효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