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원유 유출 사고가 터진 지 나흘 만에 서해안 현장을 찾았다. 사고 사흘이 지나서도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피해 지역을 시찰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언론이 ‘재앙의 현장에 대통령이 없다’고 지적하자 뒤늦게 현장에 간 대통령의 모습은 등 떠밀려 학교에 가는 게으른 학생 같아 보인다.
노 대통령은 2003년 태풍 매미의 남해안 상륙을 앞두고 비서실장 경호실장 부부와 뮤지컬을 관람했다가 나중에 “국민께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다. 노 대통령의 재난 현장 늑장 방문은 퇴임 후에 살 집의 신축공사가 한창인 고향 봉하마을을 올해 들어 다섯 번이나 찾아간 것과도 대비된다.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국민은 최고지도자의 움직임을 주목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뉴올리언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물바다가 됐을 때 항공기를 타고 둘러보다가 비판을 받자 군용 트럭을 타고 피해 현장을 누비며 복구작업을 독려하는 장면을 보여 줬다.
올해 8월 해양수산부는 울산 앞바다에서 ‘대규모 해양오염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에 따라 실시한 훈련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유출된 원유를 두 시간 만에 완벽하게 수거하고 상황 종료했다’고 국정브리핑을 통해 선전했다. 국정브리핑은 ‘참여정부 출범 이후 체계화하기 시작한 국가 위기관리가 빠르게 정착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해양부와 해경은 우왕좌왕하며 서로 일 미루기에 바쁘고, 방제 현장에서 지휘부가 가동되지도 않았다.
이 정부는 ‘매뉴얼 정부’라고 자칭할 정도로 매뉴얼 자랑을 많이 했다. 이번에도 천 대변인은 “사건 발생 후 해경과 해양부는 위기관리 매뉴얼에 따라 대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훈련 상황에서만 작동하고 실제 상황에서는 예측이 부정확하며 오작동을 일으키는 매뉴얼이 무슨 소용인가. 이번 사고는 발생 다음 날인 8일(토요일)에만 기민하게 총력 대처했어도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토 일요일은 정부의 긴급 시스템조차 나사가 풀려 있다.
지난 5년간 할일 안 할일 가리지 않고 끼어들던 대통령 비서관들은 정작 국가적 재난에는 방관자 같다. 몇몇 수석비서관은 내년 4월 총선 출마 준비로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는 소식이다. 국민이 이런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를 또 탄생시켜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