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의 전당 사고 계기 공연장 화재예방시설 점검
12일 밤 발생한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화재사고로 공연계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다. 내년에 개관 20년을 맞는 국내 대표 공연장의 무대가 불과 10여 분 만에 전소(全燒)될 정도로 화재 예방 시설이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신현택 예술의 전당 사장은 13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이번에 제대로 된 안전시설을 갖추겠다”고 다짐했다. 예술의 전당뿐 아니라 대학로에 밀집한 소극장 등 다른 공연장의 안전에 대한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공연 관람으로 송년회를 대신하는 사례가 늘면서 관객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 예술의 전당 스프링클러는 무용지물?
정확한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예술의 전당 측은 “무대 위 벽난로 내부에 설치된 팬(fan)과 조명 등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전당 측은 △무대 뒤 출연진과 로비에 5차례 안내 방송을 하면서도 정작 객석에는 대피 방송을 하지 않았고 △화재 발생 6분이 지나서야 119에 신고하는 등 긴급 대처에도 문제점을 드러냈다.
논란이 된 부분은 스프링클러 작동 여부. 예술의 전당 측은 무대 위 스프링클러가 화재 발생 2∼3분 후부터 연기 농도가 짙은 구역부터 순차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물줄기가 미미했던 탓인지 현장에 있던 관객과 출연진은 “화재 발생 5∼6분 후 방화벽이 내려지기까지 무대 위에서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날 불길은 순식간에 커튼 등을 타고 천장까지 치솟아 소방관이 도착한 뒤 20여 분 만에 꺼졌다. 결국 소화전이나 스프링클러 등 자체 시스템으로는 초기 화재 진압에 실패한 셈이다.
예술의 전당 측은 “무대막이 수없이 오르내리기 때문에 중간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 없어 60∼70m 높이의 천장에 설치된 센서에 연기가 감지돼야만 구역별로 작동한다”며 “천장이 낮은 일반 건물처럼 스프링클러가 신속하게 화재를 진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립오페라단은 공연 전 무대장치와 도구들에 대해 ‘방재시험연구원’의 방염 성능 검사확인증을 받아 제출했다. 하지만 무대 도구에서 발화된 불길이 순식간에 천장까지 치솟은 것으로 볼 때 방염 성능 검사도 요식 절차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미흡한 안전기준과 규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제작사는 일본 공연 때 국내보다 까다로운 일본 극장의 소방 규정 때문에 고생했다. 이 뮤지컬의 경우 무대에서 진짜 불을 사용하는데 국내 공연에서는 이 장면에 쓸 액화석유가스(LPG)통을 무대 뒤편에 설치할 수 있었지만 일본 공연장은 LPG통의 반입이 금지됐던 것. 또 국내 공연에서는 불꽃 높이가 70∼80cm로 ‘실감나게’ 타올랐지만 일본에서는 ‘공연 중 불꽃의 높이는 20cm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해외 공연장은 소방안전에 관한 구체적인 자체 규정을 갖고 있는 곳이 많지만 국내 공연장은 미흡하다. 서울의 경우 방염처리증명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는 몇몇 대형 공연장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방염 처리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는 곳이 수두룩하다.
한 공연제작사의 무대감독은 “방염 처리를 해도 그 효능은 6개월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예전 세트를 다시 사용하는 재공연작의 경우 방염필증을 받았더라도 6개월이 넘으면 다시 방염 처리를 해야 하지만 비용 부담 때문에 그냥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의 전당 측은 “2년 안에 올리는 재공연에는 따로 방염 처리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떨고 있는 대학로
예술의 전당 화재 파문의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는 곳은 대학로 소극장들이다. 환경이 열악한 소극장들의 상당수는 화재에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 특히 많은 대학로 소극장이 지하에 위치해 있는 데다 계단과 입구가 좁아 화재가 발생하면 꼼짝없이 대형 참사로 이어지기 쉽다.
한 극단 대표는 “대학로에서 공연해 오면서 단 한 번도 무대세트나 소품에 대한 방염처리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극장으로부터 받아 본 적이 없다”며 “방염 처리를 할 경우 세트 제작비가 1.5배에서 2배가량 더 들어 감당할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한 연출가는 “공연을 할 때마다 불안해 늘 출구 위치를 확인하고 관객을 안심시키는 차원에서 소화기를 객석 앞에 갖다 놓는다”고 했다.
100여 개에 이르는 대학로 소극장 중 보험에 가입한 곳도 극소수다. 비교적 규모가 있는 한 대학로 소극장의 관계자는 “최근에 지어진 극장을 빼고는 대학로에서 화재 보험은커녕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소극장도 드물 것”이라며 “사실 대학로 소극장의 대부분은 불이 나면 속수무책”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서울시는 한국연극협회와 함께 5억 원의 예산을 들여 대학로 소극장의 화재안전시설을 보강하기 위한 ‘공연장 안전시설 지원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남기웅 서울연극협회 사무국장은 “대학로 소극장 현실에 맞는 안전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