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던 1997년 4월 22일 오후. 긴장도 오래가면 무뎌지는 것일까. 1층 중앙홀에선 10명의 인질범이 흥겹게 5인조 실내축구를 하고 있었고, 2층에선 72명의 인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시계추가 오후 3시 23분을 가리킬 때쯤 갑자기 ‘꽝’하는 폭발음이 났다. 진압군이 200m의 땅굴을 지나 1층 바닥을 뚫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섬광탄을 쏘며 진입한 특수부대원들은 전광석화처럼 실내를 장악했다. 인질범 14명은 모두 사살되고 1명을 제외한 71명의 인질은 구출됐다. 18분 만에 끝난 기습작전으로 126일을 끌어온 페루 일본대사관 인질극은 막을 내렸다.
무장게릴라들이 리마의 일본 대사관저를 점거한 날은 인질 구출 넉 달 전인 1996년 12월 17일. 아키히토 일왕 생일 기념 리셉션이 열리던 날이었다. 웨이터로 위장해 잠입한 범인들은 폭탄을 터뜨리며 대사관저를 점령했다. 이원영 한국대사를 포함한 15개국 외교관과 페루 관료 등 400여 명이 인질이 됐다.
페루 유력 반군단체인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소속 인질범들은 수감된 동료 조직원 400여 명을 석방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인질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국제 여론과 달리 후지모리 정부는 “협상은 없다”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인질범들은 협상에 진전이 없자 20일 39명, 22일 225명의 인질을 석방하며 국제사회의 여론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했다.
당시 석방된 일부 인질은 “상황이 그렇게 살벌하진 않았다. 게릴라들의 교육 수준이 상당해 자주 토론을 벌였고 주제도 법률에서 요리까지 다양했다”고 전했다. 또 “인질범들이 인질들의 교양에 점차 동화되더니 가족과의 편지 교환과 미사의식도 허용했다”는 말도 소개됐다. 거기에서 유래한 ‘리마 증후군’은 인질이 인질범의 처지에 동화되는 ‘스톡홀름 증후군’과 대칭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리마 증후군은 결국 인질범들에게 독이 됐다. 인질들의 요청으로 들여온 기타와 보온병 속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 진압군은 대사관 내부 사정을 훤히 들여다보며 허를 찌르는 구출작전을 짤 수 있었다. 게릴라 소탕으로 후지모리는 ‘강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3선에 성공했다. 후지모리의 퇴진을 목표로 봉기한 반군으로서는 뼈아픈 참패였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