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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유권자發 정치 개혁의 날

입력 | 2007-12-17 19:53:00


미국 대통령 후보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이 1960년 TV토론에서 격돌했다. 유머작가 레니 브루스는 시청자 반응을 간명하게 묘사했다. “케네디 지지자들의 논평은 늘 ‘닉슨을 골로 보내 버렸어’라는 식이다. 닉슨 지지자들이 있는 곳에 가면 ‘묵사발이 된 케네디 꼴이 어때요?’라고 말한다.”

17대 대선 D-1이다. 각 후보가 3700만 유권자의 진짜 ‘한 방’을 기다릴 차례다.

이명박 후보가 1 대 5로 싸웠다고 개탄할 일은 아니다. 만약 정동영, 이회창, 문국현, 권영길, 이인제 후보 중에 부동(不動)의 1위가 있었다면 그가 네거티브 난타(亂打)의 표적이 됐을 게 뻔하다. 누구에게나 아킬레스건(腱)이 있고, 해묵은 재료도 먼지를 털면 근사한 새 타깃이 되는 법이다.

이번이 역대 어느 대선보다도 추악한 선거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만인의 축제(祝祭) 같은 화기애애한 페어플레이 대선이 언제 있기라도 했던가. 기억이 무디어져, 지금 상황이 가장 생생할 뿐이다. 1992년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가 붙었을 때 양김의 ‘민주화 동지 관계’는 제각각 내동댕이쳐진 헌신짝 꼴이 됐고, 초원복집 사건 같은 ‘음모 대 음모’가 판을 쳤다. 1997년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파전 때는 지역감정과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라는 해괴한 좌우(左右) 짝짓기, 그리고 경선 불복이 판을 갈랐다. 5년 전의 노무현, 이회창 결전은 이른바 ‘3대 의혹’ 흑색선전으로 얼룩졌다.

이번 대선, 긍정적 변화 많았다

이번 대선은 좌파정권의 속살이 거의 드러난 탓에 일찌감치 우열이 확연했다. 그 점이 오히려 여권(與圈)을 악에 받치게 했다. 10년 집권이 끝나 가는 상황의 권력 금단(禁斷)현상과 집단적 공포심이 사투(死鬪) 에너지로 변환됐다. 그 집요한 파괴적 공세는 대선이 끝난 뒤에도 멈추지 않을 공산이다.

이회창 후보는 과거 두 번이 너무 억울했다는 피해자 의식과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에 쫓기고 있을 것이다. 지난날 국민이 알고 있었거나 믿고 싶었던 이회창의 모습을 스스로 벗어 던진 것은 한 인간의 한계라 할 수도 있다.

이번 대선에선 ‘정치 개혁’ 구호가 실종됐다. 이명박 후보가 가끔 “여의도식 정치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한 것이 고작으로, 정치 개혁 공약이 없는 대선은 처음이다. 그러나 정치 공급자들이 뭐라 하건 말건 정치 수요자, 즉 국민이 선거 과정에서 이미 적지 않은 정치 개혁을 이뤄 냈다. 네거티브 공세보다는 미래가치 창출 능력을 보여 달라는, 뺄셈의 정치가 아니라 덧셈의 정치를 하라는 도도한 민심(民心)의 표출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뚜렷한 신호탄이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DJ와 노무현 대통령의 공동 후원을 받았고 한명숙, 유시민 씨와 다단계 예선 이벤트까지 연출했지만 신당 경선에서 3위로 패퇴했다. 정치 공급자의 독선(獨善)에 대한 정치 수요자의 분명한 거부 또한 ‘손에 잡히는’ 정치 개혁이다. 손학규 씨가 여권 경선에서 탈락하고, 5년 전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 중 다수가 한나라당 후보 지지로 돌아선 것은 정당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다.

정동영 후보가 “대통령님, 제가 ‘목포의 눈물’을 불렀습니다”라며 DJ에게 매달려도 호남 표심이 예전 같지 않고, 영남도 ‘우리가 남이가’ 같은 옛 가락만으로는 통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DJ가 혼신의 힘을 다해 몰아붙였지만 정동영, 문국현, 이인제 후보 간의 ‘묻지 마 짝짓기’는 물거품이 됐다.

세상은 결국 투표자가 바꾼다

진정 생산적인 정치인, 국민에게 함께 뛰자며 앞장서 뛰는 정치인이 승리하는 선거가 반복된다면 이보다 확실한 정치 개혁은 없을 것이다. 국민의 이익, 국가의 이익이 어디 있는지 똑바로 읽고 가장 현실적인 수단으로 국익을 창출하려는 정치인과 정당이 국민의 선택을 계속 받는다면 그 자체가 가장 성공적인 정치 개혁이다.

내일의 대선은 유권자발(發) 정치 개혁의 큰 일보(一步)가 돼야 한다. 내년 4월 9일의 18대 총선이 또 한 번의 기회다. 더디고 지루하지만 정치를 바꾸는 것은 결국 투표자들의 한 방, 한 방, 또 한 방이다. 이 한 방들이 국민의 삶을 바꾸고, 자식들을 세계에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키울 수 있는 에너지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