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열린 대학 동문회에 참석한 보험사 직원 황모(30) 씨. “꼭 참석하라”는 동기의 성화에 못 이겨 동문회에 나갔지만 기분은 썩 내키지 않았다.
몇 번 참석한 동문회에선 나이 지긋한 선배들이 정치 얘기를 나누며 언쟁을 벌이거나, 정치에 무관심한 후배들을 꾸짖는 바람에 ‘뒤끝’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황 씨는 대선 후보를 놓고 선배들 간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동문회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었다.
“3차까지 모임이 이어졌는데 30여 명의 참석자 중 누구 하나 정치 얘기를 꺼내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40대 선배들도 대선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송년회 동창회 등 한 해를 정리하는 각종 연말 모임에서 예년과 달리 ‘정치 안주’가 사라졌다.
8일 동창회를 연 경기고 84회 총동창회 수석총무 조범상(38) 씨는 “대선 후보 얘기가 잠시 나오긴 했지만 직장과 사업 얘기로 주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숭실대 중소기업대학원 동문회의 총무 장태한(48·학원 운영) 씨는 “2002년만 해도 대선 얘기가 큰 화제였는데 올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9일 열렸던 송년회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주 회사 송년회에 참석한 외국계 금융회사 임원 김모(51) 씨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아무도 대선 얘기를 꺼내지 않는데 한 외국인 동료가 “당신은 대선에서 누구를 찍을 것이냐”며 지지 후보를 물어온 것.
김 씨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글쎄” 하며 말끝을 흐렸다고 전했다.
5년 전 이맘때 노무현 이회창 두 후보를 놓고 어느 장소에서나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던 모습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후보 간 지지 불균형이 대선에 대한 관심을 크게 떨어뜨렸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후보들 모두 흠집이 적지 않아 논쟁을 벌일 명분이 사라졌다는 의견도 있다.
정치컨설팅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이명박 후보는 BBK 의혹으로부터, 정동영 후보는 현 정부의 실정 책임론으로부터,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 탈당과 ‘차떼기’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며 “누구를 지지하든 뚜렷한 명분을 갖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정치가 실종된 연말 모임에서 단연 화제는 재테크와 자녀교육 문제다.
벤처업체 팀장 김모(33·여) 씨는 11일 참석한 대학원 동문회를 ‘정보교환 마당’이라고 표현했다.
김 씨는 “아이를 어느 유치원에 보낼지, 연봉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주식시장이 불안한데 어디에 투자할지 등 송년회는 그야말로 정보를 주고받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술 권하는’ 송년회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근처 한 식당에서 열린 직장인 정동권(36) 씨의 고교 동창회는 아예 자산관리 세미나 형태로 열렸다.
정 씨는 “아무래도 한창 돈을 벌고 불려야 하는 나이인 만큼 어디에 투자하고 어떻게 돈을 굴릴지가 모두의 관심사였다”며 “모임 내내 서로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 대한 투자 조언을 해 줬다”고 말했다.
한 호텔 홍보실 관계자는 “연말 예약상황을 살펴봐도 정치적 성향을 띤 모임은 거의 없다”며 “정치권에선 대선을 앞두고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오히려 시민들은 차분해 보인다”고 말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