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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줄피카르 부토 대통령 취임

입력 | 2007-12-20 02:58:00


부토 가문은 ‘파키스탄의 케네디가(家)’로 불린다.

케네디가가 그랬듯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정치를 가업(家業)으로 이뤘다.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아버지와 두 남동생이 사형이나 의문사를 당하며 비극적인 퇴장을 한 점도 케네디 가문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부토 전 총리의 할아버지 샤나와즈 부토는 신드 주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이자 ‘신드인민당’을 창당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부토 가문을 파키스탄 정계의 한가운데 우뚝 세워놓은 사람은 그의 셋째 아들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1928∼1979)다.

줄피카르는 미국 버클리대에서 정치학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57년 최연소 유엔 주재 파키스탄 대표를 시작으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해 최연소 에너지장관과 외교장관을 지냈다.

1967년에는 파키스탄인민당(PPP)을 창당해 독자적인 정치 활동을 개시했다. 부농의 아들이었지만 줄피카르는 버클리대 유학 시절 심취했던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연설문엔 “이슬람은 우리의 신념, 민주주의는 우리의 정책, 사회주의는 우리의 경제”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했다.

창당한 지 4년 만인 1971년 12월 20일 줄피카르는 13년간의 군정(軍政)에 마침표를 찍고 민간인 출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가며 6년간 파키스탄을 통치했지만 1977년 대규모 선거 부정으로 민심을 잃으면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줄피카르는 자신이 임명한 육군참모총장의 쿠데타로 물러나고, 정적(政敵)의 살해를 사주한 혐의로 기소돼 1979년 4월 4일 교수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줄피카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산업의 국유화 정책으로 파키스탄 경제를 망쳤고, 동파키스탄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방글라데시 분리 독립을 자초한 점은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힌다. 반면 군정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의 최대 성과를 꼽자면 무엇보다 ‘두 아들을 제치고 일찌감치 장녀 베나지르를 후계자로 점찍어 세계적인 정치인으로 키워낸 것’일지도 모른다.

베나지르는 옥스퍼드대 유학 후 귀국하자마자 아버지의 몰락으로 수년간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가 창당한 PPP당을 지켜냈고 1988년 35세의 나이에 이슬람 국가의 첫 여성 총리가 됐다.

그는 두 차례 총리에 취임하고 두 번 모두 부정부패 혐의로 실각했으나 8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10월 귀국한 이후 여전히 높은 정치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버지만큼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베나지르가 내년 1월 8일 총선에서 비자금 의혹을 딛고 부토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지 주목된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