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합민주신당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졌다”고 말하면 대선 패배로 받은 정신적 상처를 위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되겠지만 민심이반 사태의 핵심을 바로 본 것은 아니다. 신당이 대패한 이유는 정치 소비자들의 구매동기를 유인하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내지 못한 데 있다.
신당은 이번 대선에서 1997년 선거 때 약발이 강했던 네거티브 ‘한 방’과 2002년 선거 때 극적 반전(反轉)을 불러온 짝짓기의 추억에 집착했다. 신당의 연사들은 선거 기간 내내 성난 얼굴과 독한 목소리로 BBK ‘한 방’ 이야기만 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네거티브의 폭언(暴言)에 유권자들은 짜증을 냈다. ‘남을 헐뜯지만 말고 너희들이 무얼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줘야지’라는 것이 대다수 유권자의 심정이었다. 위장폐업과 벼락치기 신장개업, 그리고 단일화 시도는 민심을 감동시킬 노력은 하지 않고 정치공학에만 매달린다는 부정적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노 대통령의 실정(失政)과 말 폭탄에 염증을 느끼는 국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민심에서 멀어져 갈 때 신당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대통령의 팔을 붙잡고 말려 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길을 가로막고 누워 보기라도 했는가. 실컷 권력의 단맛을 함께 즐기다 파장이 닥치자 대통령에게만 손가락질하는 것은 비겁하다.
노 대통령 잘한 일도 많아
어떤 이들은 노 대통령의 최대 치적이 “좌파 정권을 10년 만에 종식시킨 것”이라고 말하지만 너무 시니컬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노 대통령이 잘한 일도 많다. 재벌을 정치자금의 부담에서 해방시켜 이번 대선이 돈 선거로 흐르지 않은 데도 노 대통령의 공이 크다. 검찰을 사병(私兵)으로 부리지도 않았다. 검찰의 BBK 수사가 다소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네거티브 선거에 이용당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된 것은 노 대통령의 중립적인 검찰 인사(人事) 덕이다.
여당 안의 대책 없는 반미주의자들이 반대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일관되게 추진한 것도 노 대통령의 업적이다. 극좌 꼴통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국익을 위해 이라크에 파병하고 계속 주둔 기간을 연장한 것도 칭찬받을 만하다.
대선 투표일 오전에 집 근처 미장원에서 머리를 깎았다. 20대 초반의 미용사 아가씨는 “전남 목포가 고향인 아버지는 대선에서 내리 세 번째 2번을 찍었다”고 말했다. 1997년 2번 김대중(DJ), 2002년 2번 노무현, 그리고 이번에도 2번 이명박을 찍었다는 것이다. 신당 당명에는 ‘대통합’이 들어 있지만, 김대중 노무현 지지자도 통합하지 못해 자유당 이래 DJ 집권까지의 ‘정통 야당’ 세력이 51년 만에 서울에서 패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신당은 호남 지역에서 80% 안팎의 표를 얻었다. 그러나 리서치앤리서치 노규형 대표는 “서울 거주 호남 출신자들은 33.8%(이명박) 대 30.4%(정동영)로 이명박 지지율이 다소 높았다”고 말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고 강산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서울에서 살아온 호남인들은 신당 후보가 DJ에게 달려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감동을 받지 못한 것이다.
촬영 : 김동주 기자
촬영 : 김동주 기자
10년 야당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한 한나라당 사람들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또 낮춘 데 비해 신당 사람들은 연이은 집권으로 오만해졌다. 국정을 성공시키자면 반대자와 언론을 설득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신당 사람들은 같은 편끼리 모여 서로 추어주기에 재미를 붙였다. 비판세력을 설득하고 협조를 이끌어 내려고 뛰어다니는 대신에 그들끼리의 근친교배(近親交配)에 몰두하며 점령군처럼 언론을 대했다.
“기회는 다시 올 수 있다”
MBC 기자 출신인 정동영 후보는 관훈클럽 토론에서 “외교부 청사 바닥에 앉아 있는 후배들을 보면서 제가 그 자리에 앉은 것처럼 모멸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자들이 촛불을 켜고 난방이 꺼진 기자실에서 떨고 있을 때 기자 출신 신당의원들 중에 현장을 찾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한 방 만들기 작업을 도와주기를 기대하며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눈치 보기에 바빴다.
신당 사람들이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라도 정신을 차렸으면 이 지경에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당이 5년 혹은 10년 뒤에라도 재집권할 기회를 잡으려면 건강한 대안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 “기회는 다시 올 수 있다”는 말로 대선 패배에 대한 위로를 드린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