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어디일까. 날짜로만 따지자면 적도 부근 태평양의 크리스마스 섬이다.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이 섬은 지구상에서 시간이 가장 이른 곳이다. 크리스마스는 물론 새해도 가장 먼저 맞는다. 시간이 시작되는 섬인 셈이다.
인구 5000여 명, 서울보다 약간 넓은 642km²의 크리스마스 섬. 한국 원양 어선단의 정박지로도 유명한 키리바시 공화국의 33개 섬 중 가장 큰 섬이다. 세계 최대의 산호섬이자 바닷새의 낙원이다.
이 섬이 유럽인의 눈에 띈 것은 177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신항로 개척에 나선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이날 태평양의 작은 섬을 발견하고 ‘크리스마스 아일랜드’라고 이름을 붙였다. 현지어로는 ‘키리티마티(Kiritimati)’로 불린다. 인도양의 호주령 크리스마스 섬과는 ‘동명이도(同名異島)’다.
‘적도의 크리스마스’가 가진 과거는 이름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1979년 키리바시 공화국이 독립하기 전까지 영국령 식민지였다. 마을 5개의 지명도 유럽의 축소판이다. 항구가 있는 가장 큰 마을의 이름은 런던, 20세기 초 개척지 마을은 파리로 불렸다. 폴란드라는 이름의 마을도 있다.
1950년대 냉전(冷戰)이 시작되면서 이 섬은 소련과 서방 세계의 핵무기 경쟁의 각축장이 됐다. 영국은 1957년 5월 ‘그래플 작전’이라는 이름의 수소폭탄 실험을 이곳 상공에서 성공했다. 세계 3번째로 수소폭탄 보유국이 된 것이다. 1962년 미국도 작전명 ‘도미닉’ 핵실험을 이곳에서 했다. 시간이 시작되는 섬에서 지구 종말의 뇌관이 탄생한 것이다.
“뭘 그릴까 고민하다가 크리스마스 섬의 수소폭탄 실험을 떠올렸다. 과학기술을 평화적으로 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에서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사용하는 가상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만화 ‘아톰’을 그린 일본의 작가 데스카 오사무의 자서전 ‘만화가의 길’)
핵실험은 이제 멈췄다. 하지만 또 다른 재앙이 닥쳤다. 지구온난화로 이 섬이 속한 키리바시 공화국의 해수면은 연평균 6.6mm씩 상승하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류를 찾았다는 예수. 인간은 그가 도래한 지 2007년이 지난 지금까지 숱한 ‘재앙의 원죄’를 늘려 가고 있다. 심지어 그의 이름으로도. 크리스마스 섬이 인류에게 전하는 슬픈 ‘성탄 메시지’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