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냥 살짝 도망치세요.”
“그렇지만 어떻게…”
“모내기철이 다 됐는데 당신이 빨리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가난한 농부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내기철이 됐지만 입원비가 밀려 퇴원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차였다.
성산 장기려 박사가 남긴 일화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추앙받던 그가 1995년 12월 25일 눈을 감았다.
북한의 박사 공동 1호(1948년), 한국 최초의 간 대량 절제술 시술(1959년), 국내 최초 의료보험인 청십자 의료보험 도입(1968년) 등 그는 의료사에 큰 획을 그은 의사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된 것은 성공을 마다하고 어려운 환자들과 삶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출세가 보장된 경성의전 교수와 충남도립병원 외과 과장 자리를 거부하고 평양 기홀병원으로 갔다. 수술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으로 피를 사서 수술대에 오르게 하고, 겨울에는 환자들에게 내의를 사 입혔다.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는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킨 일화는 ‘돈 없는’ 환자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런 그는 평생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병원의 사택에서 살았다. 1975년 고신대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도 집이 없어 병원 측이 병원 옥상에 작은 관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재를 털어 무의촌 진료를 다녔고 청십자 의료보험을 도입해 가난한 이들에게 병원 문턱을 낮추기 위해 애썼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은 장 박사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춘원은 장 박사에게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 박사가 가장 후회했던 일은 6·25전쟁으로 남하하면서 북에 아내와 5남매를 두고 내려온 것이었다. 그는 재혼을 권유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결혼은 오직 한 번 하는 것”이라며 독신으로 살았다. 1991년 미국 친지를 통해 아내의 편지와 가족사진을 받았으나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운명했을 때 장 박사의 침대 머리맡에는 젊은 아내의 모습과 훗날에 구한 80대 아내의 모습을 담은 두 장의 사진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평생 실천하며 살아갔던 그의 비문에는 “주님을 섬기다 가신 분이 여기 잠들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