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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서울 와우아파트 준공

입력 | 2007-12-26 02:58:00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 뒤처진 탓에 곁눈질을 하거나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우리 몸속에 ‘빨리빨리 유전자’가 이식된 것도 어쩌면 이 시기였는지 모른다.

1969년 12월 26일 ‘빨리빨리’의 대명사 격인 와우아파트가 준공됐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지구에 16개 동(棟) 규모로 들어선 시민아파트였다. 착공일이 같은 해 6월 26일이었으니 6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지은 셈이다.

이 시기에 건립된 시민아파트는 와우아파트만 있었던 게 아니다. 1969년 한 해 동안 32개 지구에 406개 동, 1만5840채의 시민아파트가 지어졌다.

특히 70도의 경사가 진 산비탈에 들어선 와우아파트는 총체적 부실의 상징이었다. 이 아파트 15동은 결국 준공 뒤 4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반경 폭삭 무너져 내렸다. 새벽잠이 덜 깬 주민 70여 명이 압사하거나 다친 참사였다.

검찰 수사 결과 부실시공과 하도급 비리, 뇌물 등 온갖 건축 비리가 드러났다. ‘불도저’라는 별명의 김현옥 서울시장이 경질된 데 이어 마포구청과 건설업체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지명 수배됐다.

‘1968년부터 1970년 말까지 모두 447개 동, 1만7300가구의 시민아파트가 들어섰다. 1971∼1977년에 모두 101개 동이 철거됐고 철거비용은 447개 동 건축비에 맞먹는 50억700만 원이 소요됐다.’(서울시 ‘서울 600년사’)

개발 연대의 후유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와우아파트 참사는 우리 사회의 도덕의식을 만천하에 드러낸 계기가 됐으며 무리한 고속 개발에 대한 첫 대규모 경고였다.’(이철환 ‘네 가지 빛깔의 7080 이야기’)

이후 대연각호텔 화재(1971년),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등 안전 불감증에 온갖 비리가 더해져 빚어진 참사로 한국은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汚名)까지 뒤집어썼다.

지금 경제 규모가 이처럼 커진 데는 개발 연대의 고도성장이 밑받침됐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와우아파트 참사처럼 떠올리기 싫은 ‘불편한 진실’도 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