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난 마니아, ‘디지털 코난’ 되다
대학생 최태웅(22) 씨는 본명보다 더 유명한 예명 ‘쿠도 신이치’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일본 만화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 이름을 본떠 만든 인터넷 카페 ‘쿠도 신이치의 탐정 사무소’를 개설한 디지털 탐정이다. 이곳에서 그는 4000명이 넘는 회원과 함께 3년째 가상 사건의 범인을 알아맞히거나 직접 추리 소설을 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시작으로 경기 포천시 여중생 살인사건, 충남 천안시 여고생 실종사건 등 실제 발생한 사건들을 직접 분석해 사이버경찰청 민원게시판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경우 사건 수사본부에서 최 씨에게 연락을 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최 씨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추리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최 씨처럼 오늘도 열심히 범인을 잡으러 다니는 이들, 디지털 세상 속으로 들어간 탐정들은 말한다. “나는 추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 내 취미는 ‘디지털 탐정놀이’
자칭 홈스 마니아라는 직장인 박진철(31·가명) 씨는 현재 6개의 인터넷 추리 동호회에서 ‘떠돌이새’란 닉네임의 추리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어릴 적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를 읽고 추리 문화에 빠졌다는 박 씨는 1주일에 6일이나 동호회에 들러 직접 지은 소설을 게시하고 있다. 최근 젊은 여성들을 납치하는 연쇄살인범에 관한 장편 소설을 끝냈으며 현재는 상대방을 자살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살인마를 소재로 집필 중이다. 박 씨는 “어릴 때 방에서 혼자 추리 소설을 읽었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과 실시간으로 추리 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 더 흥미진진하다”고 말했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추리·탐정 동호회는 100개가 넘는다. 그중 ‘디텍티브007의 탐정 사무실’ 동호회는 회원 수만 2만5000여 명이다. 추리 문화가 디지털 시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각광받고 있는 것. 디지털 탐정을 자처하는 사람들 역시 1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추리 문화에 빠졌다는 ‘RS 추리 동호회’ 운영자 이정호(16) 군은 “반 친구가 학용품을 잃어버리면 ‘선풍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굴러 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추리해 준다”고 말했다.
이들은 납치, 살인, 도난, 분실 등의 다양한 추리 퀴즈를 풀거나 추리 소설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추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암호를 분석하며 독극물이나 흉기에 대한 지식도 공유하는 등 탐정 훈련을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작가 김진환 씨가 운영하는 동호회 ‘노르망디의 이방인’에서는 오프라인에서 모의사건을 열어 회원들이 서울 시내에서 단서를 찾기도 했다.
디지털 탐정답게 이들은 주로 채팅이나 메신저,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고 있으며 동호회들은 실제 사무소처럼 ‘사건 접수 담당’, ‘의뢰인(일반회원) 담당’, ‘홍보 담당’ 등 5, 6명의 스태프를 두어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인터넷으로 들어간 추리 문화… 추리를 소비하고 생산하다
추리 문화가 인터넷에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추리문학협회 이상운 사무국장은 “과거의 추리 문화가 폐쇄적이고 혼자 즐기는 문화였다면 디지털 시대의 추리 문화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형태”라며 “추리 자체의 즐거움은 물론이고 다양한 방법을 공유하고 함께 답을 찾는 과정이 놀이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협회는 20회째 ‘여름추리소설학교’를 개최하고 있는데 갈수록 학생, 주부 등 일반인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있다.
단순히 놀이 차원이 아니라 실제 사건을 해결하려는 사람도 많다. 인터넷 사기피해 정보 공유 사이트인 ‘더 치트’에서는 누리꾼들이 직접 사기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디지털 탐정 문화의 핵심은 바로 ‘자급자족’에 있다. 과거에는 추리 소설이나 영화를 읽거나 관람하는 데 그쳤다면 지금은 직접 추리를 만들고 다른 사람이 만든 추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는 “누리꾼들이 디지털 문화의 장점을 추리에 접목시켜 한국에서도 추리 문화 활성화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치열한 추리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당신이 이 기사를 보고 있는 지금도!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