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으로 산다.’ ‘밥이 보약이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말이다.
서구화된 식단으로 밥 소비량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주식으로서의 밥의 위상은 여전히 굳건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밥의 역할이 더는 영양 공급원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반찬 없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거듭나고 있다. 쌀 한 톨의 맛까지 주목한 첨단 테크놀로지가 소비자의 미각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쌀 한 톨까지 골고루 신경 쓴다는 점. 즉석밥과 밥솥업계는 쌀에 초고압을 가하거나 솥의 열전도율을 높인 새 기술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 수심 1만 m 3배 수압이 밥알을 쫄깃하게
동원F&B는 6월 3000기압의 초고압으로 찐 즉석밥을 내놨다. 3000기압은 지구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수심 1만1000m)보다 3배나 더 높은 압력이다. 이런 높은 압력을 받으면 쌀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초고압에서 쌀을 구성하는 세포의 막 표면은 공기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해진다. 이때 세포막의 강도가 낮아지면서 안쪽 전분 입자에 수분이 쉽게 스며든다. 유체(물)에 압력을 가하면 그 안에 있던 물체(쌀)에도 골고루 압력이 가해지는 ‘파스칼의 원리’를 따랐다.
동원F&B 부설 식품과학연구원 김영경 연구원은 “초고압을 받은 쌀은 수분 함유량이 2% 높아지면서 씹을 때 쫄깃해진다”며 “영상의 기온에서 내린 눈이 습기를 많이 머금어 잘 뭉쳐지는 원리와 같다”고 설명했다.
CJ와 농심, 오뚜기 등 즉석밥 업체는 초고압을 쓰지 않는다. 굳이 초고압 처리를 안 해도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즉석밥을 만드는 조건은 ‘4기압, 섭씨 150도’를 넘지 않는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압력밥솥은 ‘1.2기압, 섭씨 120도’의 조건을 유지한다. CJ 관계자는 “압력 외에도 온도, 쌀의 종류 등 밥맛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며 “일본에서는 초고압 처리를 한 밥이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말했다.
○ 사방에서 열 쬐어 고슬고슬
밥솥의 진화도 현재진행형이다. 한 가지 사례가 밥솥 내솥의 바닥과 옆면을 동시에 데우는 ‘통가열식’ 밥솥이다. 1990년대만 해도 밥솥은 대부분 밑바닥만 가열하는 ‘열판식’이었다. 아래부터 천천히 데워지기 때문에 한 번에 밥을 많이 지을 경우 ‘층층밥’이 되곤 한다. 통가열식은 이런 걱정이 없다.
그 비결은 솥 주위를 감은 구리 코일에 있다. 이 코일에 전기를 반복적으로 켰다 끄면 ‘맴돌이 전류’ 현상이 나타난다. 이 전류 주변에 생기는 빙글빙글 도는 자기장이 솥 내부 금속의 자기적 성질을 불규칙하게 바꾸며 열을 낸다. 마이크로파가 음식물 속의 물 분자를 진동시켜 열을 내는 전자레인지와 원리가 비슷하다. 전기가 전선을 흐를 때 생긴 열로 밥을 짓는 열판식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다.
내솥 바깥을 금이나 구리로 얇게 입히기도 한다. 솥의 주요 재질인 스테인리스강의 열전도율은 낮다. 열전도율이 낮으면 쌀에 열이 전달되는 속도가 더디다. 스테인리스강보다 구리는 12배, 금은 9배나 전도율이 높다.
재미있는 사실은 구리를 도금할 때 정확히 3μm(마이크로미터·1μm는100만분의 1m) 두께로 입혀야 한다는 점이다. 웅진쿠첸 생활가전 기술연구소 박현중 연구원은 “도금이 지나치게 두꺼우면 코일의 전류가 내솥까지 닿지 못해 가열이 잘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이정호 동아사이언스 기자 sunrise@donga.com
▼ 고조선의 밥맛을 잊지 못해▼
진화하는 전기밥솥 모델은 기원전의 무쇠솥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노력이 현대에 들어서야 시작된 건 아니다. 기원전 시대인 고조선 유적에서 발견되는 무쇠솥은 감칠맛 나는 밥을 짓기 위한 조건을 정확히 갖추고 있다.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 과학기술사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무쇠솥에서 지은 밥은 색깔, 윤기, 냄새, 찰기 등이 다른 용기로 지은 밥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이유는 두꺼운 바닥과 얇은 측면을 지닌 무쇠솥의 구조. 연구팀에 따르면 무쇠솥의 바닥은 측면보다 2배나 두꺼웠다. 불과 가까운 바닥은 두껍게, 먼 쪽은 얇게 만들어 열을 솥 전체로 골고루 전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높이가 낮고 밑바닥이 넓은 무쇠솥의 형태는 열의 고른 전달을 돕는다.
전기가 보급되면서 생산된 전기밥솥은 밥통 밑면의 중심부분만 가열됐다. 일부분만 달아오르기 때문에 열이 쌀까지 전달되는 데 더딘 편이다.
이에 비해 압력밥솥은 바닥 전체에 불이 닿는 방식. 전기밥솥보다 쌀에 열이 전해지는 면적이 넓다.
통가열 전기압력밥솥은 열이 전달되는 면적이 넓은 무쇠솥의 장점을 모방했다.
박현중 웅진쿠첸 생활가전기술연구소 연구원은 “무쇠솥은 몸통의 3분의 2가 아궁이에 잠겨 있다”며 “밥솥 측면에 구리 코일을 감아 열을 만드는 통가열 전기압력밥솥의 원형인 셈”이라고 말했다.
이정호 동아사이언스 기자 sunri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