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8일. 서울 청량리경찰서에 동대문구 전농동의 세탁소 주인이 보낸 제보가 들어왔다. “한 청년이 피 묻은 청바지를 맡기고 갔다”는 것이었다.
세탁소 앞에 잠복해 있던 경찰은 청바지를 찾으러 온 청년을 붙잡았다. 160cm도 안 되는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인 그 청년은 경찰 조사에서 뜻밖의 사실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김대두(당시 26세). 두 달 가까이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연쇄살인범이 바로 그였다.
그해 8월 12일 전남 광산군(현 광주 광산구)의 한 외딴집에서 주인 안모 씨를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10월 8일 검거될 때까지 55일 동안 김대두는 서울 경기 전남을 오가며 9차례에 걸쳐 17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3명을 강간했다. 전남 무안에서는 일가족을 살해했고, 서울에서는 칠순 할머니와 어린아이까지 죽였다.
전과2범이었던 그는 범행 동기에 대해 “교도소에 있다가 나오니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남들처럼 잘살기 위해 돈을 구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한 것에 대해 “어른은 내 얼굴을 기억할 것이고, 어린이는 우는 소리가 귀찮아서였다”고 태연히 말해 공분(公憤)을 자아냈다.
법원은 1심에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76년 3월 18일 항소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됐다. 그는 상고를 포기해 이날 판결로 사형이 확정됐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김대두는 당시 국선 변호인이던 이상혁 변호사와 서울구치소 교화위원들의 노력에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형이 확정된 후 그는 기독교에 귀의해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를 보냈다.
1976년 12월 28일. 김대두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형 집행장에 입회한 목사에게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친다.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시정되었으면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형폐지운동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 변호사에 따르면 김대두는 마지막 처형 순간에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웃는 얼굴로 사형대에 올랐다고 한다.
만약 한국 사회가 두 차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를 좀더 따뜻하게 감싸 안았더라면 희대의 살인 질주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