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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내가 만난 부토

입력 | 2007-12-29 03:00:00


“한국과 파키스탄은 식민지 경험과 독립 시기, 민주화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 등 역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벌써 세계 11위(무역 규모 기준)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제3세계의 모델 국가입니다.” 1996년 방한한 베나지르 부토 당시 파키스탄 총리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 경험을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부토는 경제를 국가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인구 1억6000만 명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 2600달러로 가난한 나라다.

▷부토 여사에게서는 서구식 합리주의와 이슬람의 가부장적 정서가 혼재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를 가린 흰색 차도르와 대조적으로 발톱엔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맨발 차림이었다. 달변에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남편의 부패 혐의를 묻는 삐딱한 질문에 대해서는 “정치적 탄압을 받을 당시 우리 부부에겐 29개의 부패 관련 죄목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집권한 이후 모든 부패 고리를 끊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도 무능과 부패 혐의로 총리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부토 여사는 부친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파키스탄 대통령에게서 정치적 유산(遺産)과 부채를 한꺼번에 물려받았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파키스탄인민당(PPP) 당수가 된 그는 독재치하에서 9차례나 체포돼 5년 반 이상 감옥과 연금생활을 거쳤다. 그는 인터뷰에서 “1979년 아버지가 교수형을 당했을 때 나는 연금 상태였다. 지금도 잠이 들면 아버지 꿈을 꾸고, 잠이 깨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받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부친의 못 다한 정치적 이상을 펼치려는 야심을 떨치지 못하고 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에 나섰다. 혼미한 정국 상황과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0월 무샤라프 대통령과 권력 분점을 노리고 귀국을 강행했다. 귀국 당일 반대파는 폭탄 테러로 그를 맞았다. 그로 인해 130여 명이 사망했지만 굴하지 않고 선거 유세를 계속했다. 테러에 희생된 부토의 죽음으로 파키스탄은 다시 민주주의의 시험대에 올랐다. 그리고 세계는 또 한 명의 용감한 여성 지도자를 잃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