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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76년 파블로 카살스 출생

입력 | 2007-12-29 03:00:00


그가 아니었다면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은 영원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아름다운 곡은 ‘첼로의 성서’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첼로는 깊은 음색을 묻어두고 그저 평범한 악기의 하나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아버지로부터 처음 첼로를 선물 받은 날 13세의 파블로 카살스는 부둣가의 헌 책방에서 한 묶음의 낡은 악보집을 우연히 집어 들었다. 200여 년간 먼지 속에서 잠들어 있던 바흐의 걸작이 그의 손에서 깨어났다.

12년간 매일 밤마다 연습을 거듭했던 카살스는 25세가 되어서야 이 곡을 대중에게 공개했고 60세에야 녹음을 허락했다.

‘첼로의 성자(聖子)’로 불리는 카살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쪽 카탈루냐 지방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세 때 바르셀로나의 음악학교에서 처음으로 첼로를 접했다. 당시의 명연주자 호세 가르시아의 연주를 들은 그는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첼로의 음색에 빠져들었다.

가르시아를 사사한 그는 3년 만에 스승을 능가하는 첼리스트로 명성을 떨쳤다. 스페인 여왕의 초청을 받기도 했고 새로운 운지법을 고안해 첼로 연주의 역사를 다시 썼다.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21세에 오페라의 지휘를 맡았고 화가 드가, 철학자 베르그송, 작곡가 라벨, 생상과 교류하며 지식을 쌓았다. 마르크스의 책을 읽으며 사회주의에 매료됐고 인간에 대한 회의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19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작은 관현악단을 만들어 ‘음악은 특정인이 아닌 만인의 것’이라는 신념을 실천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 그는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맞았지만 그의 인품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번번이 풀려났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한 카살스는 프랑코의 독재정권을 공식 인정한 국가에선 어디든 연주를 거부했다.

96세의 나이에 심장질환으로 운명한 그는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에도 바흐의 곡을 들었다. 한 음악평론가는 “카살스는 잔인한 대학살이 어느 때보다 많았던 20세기를 인간이 견뎌낼 수 있도록 신이 내려준 축복이자 선물”이라고 평했다.

그의 삶은 이 한마디로 축약된다. “저는 먼저 한 인간이고 다음으로 음악가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나의 첫 번째 의무는 인류의 평화와 행복입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