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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盧정부 반면교사 10년]독선이 부른 국론분열

입력 | 2007-12-29 03:38:00


여론에 귀막고 ‘밀어붙이기’… 햇볕도 개혁도 꼬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햇볕정책’과 ‘코드 입법’은 성역이었다. 정권 내부에서 그 정당성이나 실효성에 관한 논의가 금기시되었음은 물론이고 정권 밖의 비판에 대해서는 ‘수구’ ‘꼴통’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침묵을 강요했다.

항상 국민을 가르치려 드는 대통령, 출세를 위해 맹목적 충성을 다하는 정부 고위직과 관변 학자들, 비판세력에 대해 저주와 조롱을 퍼부으며 정권과 공생한 여당과 친여 매체, 관변 시민단체들이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은 좌파적 정책을 독선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소수 집권세력에 의한 국민 다수의 소외와 함께 정책의 오류를 진단하고 교정하는 시스템의 마비로 이어졌다.

DJ 독단적인 대북정책… 연방제 인정에 불법송금까지

盧정부, 사학법 등 무리한 추진 갈등만 낳고 흐지부지

“타협 모르는 투사 마인드가 합의도출 시스템 망가뜨려”

○ 독선적 햇볕정책 밀어붙여 남남 갈등 심화

김대중 정부가 ‘퍼주기’ 논란 속에 속도와 성과에 대한 논란을 무시하고 밀어붙인 대북 햇볕정책은 극심한 ‘남남 갈등’을 초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산적한 국내 현안을 제쳐 놓다시피 하면서 햇볕정책에 ‘올인’(모든 것을 기울임)하는 것을 놓고 그 배경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김 전 대통령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추진과정의 논란을 뒤로한 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퇴임 후인 2003년 대북 송금 특검을 통해 정상회담 직전 4억5000만 달러를 북측에 비밀 송금한 ‘대북 뒷거래’가 드러남으로써 노벨상의 빛이 바랬다.

정상회담 합의문에 담긴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 인정’ 조항도 내부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초헌법적 합의로 북측의 대남전술에 말려든 것이라는 비판을 낳았다.

독선적 정책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거세질수록 수적 우위를 통해 이를 제압하려는 김 전 대통령의 집착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노선과 이념을 무시한 지역연합으로 출발했던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은 결국 2001년 9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집행에 앞장섰던 김 대통령의 측근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처리에 자민련이 동조함으로써 결별에 이르렀다.

또 1997년 12월 대선 당시 국민회의(77명)와 자민련(43명)의 의석이 2년 뒤인 1999년 12월 말 국민회의 103명, 자민련 55명으로 합쳐서 과반수에 이르렀다. 여소야대를 무리하게 여대야소로 만드는 과정에서 ‘정치적 뒷거래설’이 만연했고 대야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야당을 ‘대등한 협상 파트너’라기보다는 ‘설복시켜야 할 대상’ 정도로 간주하는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지적이다.

○ 오만이 불러 온 ‘코드 정책’ 소용돌이

2004년 17대 총선에서 ‘탄핵풍’에 힘입어 예상치 않던 과반 의석을 차지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기세등등했다.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은 “건국 이래 처음으로 개혁세력이 의회를 장악했다”고 자랑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곧 ‘기득권층 개혁’을 겨냥한 이른바 ‘4대 개혁입법’ 추진을 전면에 내세웠고, 나라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언론계와 교육계 등의 비판론을 봉쇄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진보적 역사관을 주입시키려 한다는 비판이 이어졌지만 ‘참여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은 이념 대결만 극대화시켰고, 신문법은 2005년 국회를 통과했지만 헌법재판소는 많은 독소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무리를 거듭해 개정한 사립학교법은 2년여에 걸쳐 극심한 논란을 일으켰고, 17대 대선을 앞두고 종교계의 표를 의식한 대통합민주신당에 의해 사실상 원상복구됐다. 과거사법 역시 지금까지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이나 부동산 정책, 국가정체성을 무시한 대한민국사에 대한 독선적 역사관의 강요 등도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 정부 역시 퍼주기식 대북정책과 북한 감싸기, 저자세 대북정책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대선을 2개월여 앞둔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나, 북한 핵 폐기 약속과 국군포로 등의 해결 없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경제지원 약속만 했다는 비판이 무성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모두 민주투사라는 강한 신념으로 인해 조정 타협 합의 양보보다는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었다”며 “본인들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신념의 발로겠지만 그들을 주류로 인식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독선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코드나 뜻에 맞는 사람들과만 독선적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정상적인 시스템 작동이 결여됐고 다양한 의견 포용이 불가능해지면서 정치적인 양극화가 생겼다”고 비판했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지지를 못 받은 것은 국민의 실질적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것과 독선적인 자세 때문인데 그 원인 진단을 제대로 못했다. 국민 지지 상실을 언론, 특히 보수 신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적대시했다”고 말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DJ땐 ‘의원 꿔주기’… 盧정부땐 ‘당적 세탁’

정당 민주주의가 웃음거리로▼

민주개혁세력을 자처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 체제의 중요한 축인 정당정치의 측면에서는 역설적으로 비(非)민주적인 구태를 답습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의원 꿔 주기’라는 웃지 못할 희극이 연출됐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DJP(김대중+김종필)공조를 통해 공동정권을 창출한 자민련이 17석 밖에 얻지 못해 원내 교섭단체(20석 이상)가 되지 못하자 그해 12월 30일 민주당은 송석찬 배기선 송영진 의원을 자민련에 입당시켰다. 이듬해 1월에는 장재식 의원이 뒤를 이었다.

‘자민련 교섭단체 만들어 주기’를 위한 이들 의원의 당적변경 사태는 결과적으로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마치 ‘물건’처럼 정당 간에 서로 주고받은 모습이 됐다.

이런 ‘의원 빌려 주기’는 정당과 의회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는 헌정왜곡 사례이며 ‘정당정치의 희화화(戱畵化)’라는 비판이 거셌다. 당시 민주당 지도부는 “정국 안정을 위한 살신성인이자 고육책”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송석찬 의원은 이후 2003년 본보 인터뷰에서 “정치사를 굴절시킨 나 같은 정치인은 앞으로 나오지 않기를 빈다. 나는 뒤늦게 내 행동이 국민의 뜻과는 거리가 먼 정당정치 파괴행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탄핵 국면에 힘입어 2004년 17대 총선에서 152석의 과반의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은 올해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이름으로 대선을 치렀다.

원내 제1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과 열린우리당 탈당파, 민주당 탈당파, 시민사회단체, 손학규 전 경기지사 그룹 등 7개의 비동질적 정치세력들이 모여 대선 4개월을 앞두고 창당한 ‘대선용 정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 의원 20여 명은 당적을 6개월 새에 4차례(17대 국회 전체로는 5차례)나 바꾸기도 했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정치에서는 찾아보기가 극히 드문 사례였다.

현 정부 및 자신들의 실정(失政)에 대한 반성과 이를 통한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수구냉전보수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가치와 정책노선이 다른 정치세력과의 대선용 ‘짝짓기’에 골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당은 일정 기간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해 대선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현 정부의 사실상 집권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이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고질적인 돈 선거 풍조와 정경유착이 상당 부분 사라진 점은 긍정적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또 권위주의 타파와 특권 폐지에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다는 긍정론도 있으나, 지켜져야 할 권위를 상실한 채 무질서와 국격(國格)의 추락을 초래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