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훈 2단(왼쪽)과 아버지 한열홍 씨가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한 2단이 최근 둔 바둑을 복기해 보고 있다. 용인=이훈구 기자
이세돌 9단과 후회없는 승부를
상훈아, 네가 수졸(守拙·초단의 별칭)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것이 2006년 말이니까 이제 1년이 조금 넘었구나. 입단 전 분루를 삼키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것을 돌아보면 지금 네가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 오른 일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격세지감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하다. 네가 거둔 성과도 좋지만 훌륭한 선배 기사와 반상에서 겨루었다는 자체로도 속없는 부모는 기쁘고 좋기만 하다.
어릴 적 엄마가 읽어준 동화 속의 미운 오리새끼가 불쌍하다고 울먹였던 상훈아, 백조가 되어 훨훨 날아간 오리새끼처럼 지금 편 날개가 부디 꺾이지 않기를 바란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장래의 꿈에 대해 적어 오라는 숙제를 내 준 적이 있었다. 아직 영글지 않은 바둑 실력에 수줍음 많던 네가 당돌하게 ‘세계적인 프로 바둑기사가 돼 우리나라를 빛내고 싶다’고 적었던 게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바둑을 시작해 다른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고 성실하게 걸어온 너의 길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힘들었다. 뛰어난 천재성으로 다이아몬드처럼 지존의 빛을 발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바위에 박힌 자수정 같은 아이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래 갈고 닦았더니 자신만의 소박한 빛을 내는 그런, 엄마 아빠에겐 아름다운 돌이었다.
입단 직후 네 스승인 김원 7단이 엄마 아빠를 불러 “상훈이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성실성과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어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기쁘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반신반의한 점도 있었다. 바둑계에선 늦게 입단하면 보통 성적을 내기 힘들다고들 하지 않니.
그러나 입단 후 얼마 안 돼 ‘초단 돌풍’의 주역으로 왕위전 도전자 결정전에 이어 LG배 결승에 올라가 주위를 모두 놀라게 했지. 김 7단의 예언이 일찍 들어맞았다.
나는 작년 네가 분에 넘치는 성적을 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2, 3년은 더 검증을 받아야 ‘반짝 성적’을 냈다는 얘기를 듣지 않을 게다. 2월에 열리는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은 네 바둑 인생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상대인 이세돌 9단에 비해 수읽기나 경험 등 많은 면에서 부족하지만 최소한 이 9단의 ‘기세’에는 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든 이기든 네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바둑을 뒀으면 한다.
바둑 때문에 하지 못한 많은 것에 대한 갈증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며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궁금함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부족함은 프로 기사로서 좋은 성적을 내면서 보람과 행복을 느낄 때 일부나마 채워지지 않을까? 그러면 인생을 걸 만한 가치 있는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 기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규칙적인 생활이 안 되기 십상이다. 항상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상을 점검해야 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부디 초심을 잃지 말며 겸손하고 예의 바른 바둑인으로 성장하길 빈다.
아들아, 이제 이런 일들은 청년이 되는 네가 짊어질 몫이며 가족인 우리는 너의 뒤에서 격려하고 위로하며 조용히 지켜볼 뿐이란다.
치열한 승부사의 삶 속에서도 인생이 소중하고 가치 있으며 행복하다고 느낄 줄 아는 아름다운 청년 상훈이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