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2~24일 성남아트센터
《2002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뮤지컬로 퀸의 노래 24곡을 엮어 만들었다. 컴퓨터 음악만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획일화된 2302년 미래 사회가 배경. 록 음악의 자유로운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보헤미안과 선지자 갈릴레오는 ‘퀸’의 음악을 전 세계에 전파시켜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줄거리. 내한 공연 2월 2∼24일 경기 성남시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4만∼15만 원. 1588-4558》
유명 가수의 노래가 줄줄이 흘러나오는 이른바 ‘주크박스 뮤지컬’의 생명은 음악이 갖는 대중 친화력이다. 아바 음악으로 엮은 ‘맘마미아’의 성공이 그렇고 영국의 극장가 웨스트엔드에서 6년째 히트 이력을 쌓은 ‘위 윌 록 유(We Will Rock You)’도 음악이 갖는 광대한 흡인력에 기댄 작품이다. 아바가 1970년대 댄스음악의 선봉장이고 퀸이 당대 로큰롤을 주도했던 밴드라고 한다면 이 뮤지컬 역시 태생적으로 흥행이 보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제로 객석에서는 쉴 새 없이 웃음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록이라면 축구만큼이나 발열(發熱)하는 영국인들로서는 ‘섬바디 투 러브(Somebody to Love)’ ‘위 아 더 챔피언스(We are the Champions)’ ‘돈트 스톱 미 나우(Don’t Stop Me Now)’ 등 추억과 그리움을 자극하는 퀸의 명곡들이 마구 쏟아지는데 조용히 앉아 감상하기란 어렵다.
특히 ‘보헤미안 랩소디를 듣고 싶으세요?’라는 자막과 함께 마지막에 대표작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나올 때 런던 도미니언시어터는 관객들의 아우성과 광란으로 덮여버렸다.
2003년 ‘위 윌 록 유’가 초연되었을 때 영국 평단의 시선은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맘마미아’의 뒷북이라는 점은 운명이라 쳐도, 2302년 모든 악기가 사라진다는 설정의 미래형 스토리는 신선미가 떨어지고 극작과 연출을 맡은 벤 엘턴의 소재 구성도 황당하고 엉성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보다 더한 제작진의 부담이 있었다. 퀸의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뮤지컬을 보면서 ‘과연 배우들이 얼마나 프레디 머큐리의 매직 보컬을 잘 뽑아낼 것인가’ 기대 혹은 예의 주시할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3옥타브를 넘나드는 고음역에 천상의 바이브레이션(떨림)까지 갖춘 머큐리 노래는 사람들 뇌리 속에 마치 부적처럼 붙어 다녀 솔직히 그것의 완벽 재현은 거의 불가능하다.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퀸의 멤버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는 벤 엘턴과 함께 퀸 레퍼토리의 절묘한 선곡과 배치를 통해 유쾌한 재미를 쾌척해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노래 듣는 맛으로 프레디 머큐리와의 비교를 차단해낸 것이다. 워낙에 음악이 신나다 보니 유난히도 노래와 가수 이름을 많이 동원한 대사마저도 유머러스하게 들린다. 즐겁게 퀸을 추억하고 산뜻하게 퀸 음악을 보고 듣는 자리로 꾸며낸 것이다.
‘위 윌 록 유’의 성공은 결국 극본,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가 아니라 순전 퀸의 음악 그 자체인 셈이다. 고금을 관통하는 퀸 음악의 힘을 믿은 정직성의 결과라고 할까. 이게 아니라면 초기 악평에도 불구하고 6년째 롱런에 성공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와 관련해 뮤지컬 ‘위 윌 록 유’의 과정은 평론가들의 악의적 논평과 대중의 무한한 사랑이라는 팽팽한 대치로 규정되는 퀸이 밟아온 궤적과 정확히 닮아 있다.
제작진이 호소한 것은 퀸의 음악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점점 발을 붙이지 못하는 실제 연주음악, 라이브 음악 그리고 록 음악에 대한 영국의 자부심과 애정이다. 퀸의 음악을 가지고 이런 것들을 상징화해 낸 것은 이 뮤지컬의 독점적 개가가 아닐 수 없다. 라이브 콘서트를 방불하게 하는 생생한 연주, 어떤 음악도 덤비지 못하는 록의 강한 울림을 통해 ‘이게 진짜 음악이고 진짜 영국음악’이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다른 히트곡을 놔두고 굳이 제목을 ‘우리 모두 록을!’이란 뜻의 ‘위 윌 록 유’로 내건 것이 말해 준다. 컴퓨터가 인위적으로 생산하는 음악, 획일적인 댄스음악을 향해 록을 향수했던 기성세대의 반발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이다. 객석의 포만감이 여기서 빚어진다고 본다.
예나 지금이나 퀸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밴드’인 점을 전제할 때 이 같은 접근법은 영국적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닌다. 곧 국내에도 선보일 이 뮤지컬이 이걸 바랄 것이다. 모처럼의 ‘콘서트 뮤지컬’을 본다. 콘서트라는 말에 담긴 생음악, 변방으로 내몰린 로큰롤 음악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퀸 노래에만 열광해도 된다.
런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