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대륙 탐사를 위한 전초기지인 패트리엇힐을 떠난 지 43일째다. 탐험대원들의 몸은 이제 천근만근. 짙은 구름과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화이트아웃’(눈 표면에 가스가 덮여 원근감이 없어지는 상태) 현상이다. 발을 내딛는 곳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
극점은 어딜까. 다 온 걸까. 아니면 아직 한참 더 가야 할까. 방향을 잘못 든 건 아닐까. 아니다. 극점이 코앞에 있다. 그 희망만이 우릴 살린다….
허영호 공격대장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기온은 영하 30도를 오르내린다. 바람이 초속 20∼30m로 대원들의 차가운 뺨을 할퀸다. 김승환 유재춘 홍성택…. 대원들 모두 말이 없다. 세찬 바람과 자외선에 얼굴이 부어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얼굴에서 진물이 흐른다. 덥수룩한 수염에 고드름이 붙었다.
그래도 행군은 계속된다.
오후 7시. 텐트를 쳤다. 이제야 화이트아웃 현상이 사라졌다. 앞이 보인다.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핀다. 한참 망원경을 돌릴 무렵, 불쑥 시야에 까만 점이 나타났다. 미국 스콧-아문센기지의 은색 돔이다. 남위 90도 지점. 극점이다.
“저기다!”
허 대장이 소리쳤다.
‘내일이면 극점을 밟는다….’ 대원들이 다시 힘을 낸다. 다음 날. 행군 44일째.
그날 오후 6시 반. 드디어 극점이었다. 1994년 1월 10일 한국남극점탐험대 허영호 공격대장 등 대원 4명이 1400km를 가로질러 남극점에 도달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얼싸안고 울고 또 울었다. 울다가 눈마저 퉁퉁 부어올랐다. 극점에 태극기를 꽂았다.
“우리는 해냈습니다! 여기가 남극점입니다!”
백야의 만년설을 헤치고 세운 한국 탐험대의 기록은 일본 탐험대가 1993년 67일 걸린 것을 23일이나 줄인 대기록이었다.
일본 탐험대가 두 번이나 비행기로 식량을 보급받은 것과 달리 한국 탐험대는 한 번도 보급받지 않았다. 개썰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극점에 이른 것도 대단했다. 도보로 남극점에 이른 나라는 이전까지 영국과 일본뿐이었다.
남극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북극과 함께 지구 3극점으로 불린다. 한국은 이날 남극점 정복으로 1977년 에베레스트 정복, 1991년 북극점 정복에 이어 3극점을 모두 밟았다. 1995년 허 대장은 남극 대륙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에 올라 3대 극점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밟은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 됐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