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법인에 다니는 회사원 최윤석(28) 씨가 회사에 출근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옆 사람 챙기기다.
먼저 오늘 함께 일할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팀원들과 함께 점심 먹을 장소를 예약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업무시간에는 이른바 ‘묻어가기’ 전략으로 일하고 있다. 팀제 분위기에서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일하는 게 그만의 노하우다. 최 씨 수첩에는 회의 시간에 남들이 말한 내용이 모두 적혀 있고 자료도 스크랩해 놓았다. 최 씨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조연배우인 새뮤얼 잭슨. 그의 좌우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뻐꾸기론’이다. “뻐꾸기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최 씨가 2인자를 자처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1등을 바라보며 공부한 최 씨는 과학고 진학 후 자신보다 뛰어난 친구가 많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최고가 되기보다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최 씨는 “요리를 좋아하는 동료를 도와주면서 나 역시 요리에 빠져 지금은 동료들에게서 좋은 음식점을 추천해 달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가 2인자를 예찬하는 이유는 바로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1등 아닌 2등에 만족하는 사회?
정보기술(IT) 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 김지영(가명·30·여) 씨의 생활신조는 일명 ‘WLB(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생활을 놓고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회사지만 김 씨는 직장에서 1인자가 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일을 제외하곤 밤 12시까지 남아 야근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상사와의 술자리에도 끼지 않는다. 그 대신 김 씨는 예전부터 자신이 좋아했던 춤을 위해 퇴근 후 연습실로 곧장 향한다. 퇴근 후 3∼4시간은 기본이고 공연이 있을 때는 오전 2시까지도 몸을 불사른다. 최근 댄스강사 자격증도 땄다는 김 씨는 “갈수록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회사 1등’보다 내 삶에서의 1등이 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한 기업 광고.
우리 시대 1등이 최고의 미덕인 줄만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1인자만큼이나 주목받는 2인자들이 각계각층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1인자를 보필하는 ‘1인자 메이커’로서, 모든 것을 희생하기보다 적당히 살며 삶을 즐기려는 ‘실속파’로서…. 귀결점 역시 ‘굵고 짧게’가 아닌 ‘가늘고 길게’ 살고자 하는 것이다.
2인자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대중문화 분야다.
과거처럼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2인자는 사라지고 ‘2인자=개성 강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연예계 2인자들을 1인자로 만든다는 SBS 오락프로그램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이 있는가 하면 시청률 30%에 육박하는 MBC의 인기 사극 ‘이산’에서는 주인공인 정조(이서진)만큼 그를 돕는 2인자 홍국영(한상진)이 인기를 얻고 있다.
탤런트 한상진은 “일명 ‘킹 메이커’인 ‘책사(策士)’는 뭔가를 만들어 가는 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역할이라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2인자를 주제로 한 책 역시 2000년부터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얼마 전 삼국지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2인자 리더십’ 책을 쓴 한중문화연구소의 나채훈(61) 소장은 “여러 이해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사회에서 2인자의 역할이 1인자 못지않게 커졌다”고 말했다.
2인자 붐은 ‘2인자 카페’, ‘2인자 클럽’ 등 인터넷 동호회까지 만들었다.
○ 2인자? 나도 해보지 뭐… 절반이 긍정적
이런 2인자 붐은 설문조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동아일보는 인터넷 쇼핑몰 ‘G마켓’과 함께 누리꾼 2302명을 대상으로 2인자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먼저 2인자의 이미지에 대해 물어본 결과 응답자의 절반이 훨씬 넘는 60.9%가 ‘나름의 영역을 개척하며 인정받는 창의적 인물’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1인자를 만드는 사람’(15.8%), ‘가늘고 길게 활동하며 생명력을 유지하려는 인물’(13.4%)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만년 2등으로 남은 불운한 인물’(8.4%), ‘패배자’(1.5%) 등 부정적인 답변은 10%도 넘지 않았다. 2인자의 이미지가 의외로 좋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2인자가 주목받는 현상에 대해 응답자의 47.7%는 ‘문화가 다양하고 1인자 못지않게 인정받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엔터테인먼트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꼽은 응답자가 19.9%로 그 뒤를 이었다.
직접 2인자가 되고자 하는 응답자 역시 절반에 달했다.
‘하는 일이 즐겁다면 2인자도 마다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8.7%가 ‘당연하다’, 34.5%가 ‘그럴 의도가 있다’라고 답해 긍정적인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 응답자의 46.1%는 ‘2인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이어 ‘사회 변화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견이 27.7%였고 ‘순간의 유행으로 끝난다’는 부정적인 의견은 9.3%에 그쳤다.
○ 책임지기 싫어 vs 문화가 다양해졌다
그렇다면 이처럼 2인자가 사회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1등에 대한 불안감을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다. 1등을 하려는 것, 1등이 된 후 이를 지키는 것 등 ‘1등 지상주의’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감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헤드헌팅 회사 ‘엔터웨이파트너스’의 박운영 부사장은 “취업 관련 상담 10건 중 2, 3건이 ‘현재 직장에서 오래 남는 법’에 대한 문의”라며 “갈수록 은퇴 연령이 빨라져 1인자, 성공의 개념보다는 느리게 사는 방법을 찾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반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38년간 비서로 일해 온 ‘뱅크 오브 아메리카’ 서울지점의 이금자 수석비서는 “2인자의 가장 큰 매력은 위험 부담이 적은 것”이라며 “현대 사회는 대부분 1인자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구조이기에 2인자에 대한 평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승진’에 대해 굳이 집착하지 않는 반응을 낳는다. 이 수석비서는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 더 좋은 직책으로의 승진도 마다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 손수제작물(UCC) 등 디지털 문화와 맞물리며 더욱 확산되고 있다. 기존의 ‘대중’이 수동적인 존재였다면 이제는 능동적인 주체로 바뀌면서 다양한 문화를 스스로 이끄는 세력이 된 것이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을 쓴 국회의원 보좌관인 이철희 씨는 “자기주장을 담은 여러 매체가 등장하면서 1인 독식구조가 무너졌다”며 “훌륭한 2인자에 대해 사회가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