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커버스토리]2인자 대박 사건

입력 | 2008-01-11 02:59:00


《“그를 결코 이길 수 없었어. 그 마음이 나를 한평생 괴롭혔지. 결국 그가 승리자야. 과거를 떠올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1823년 오스트리아 빈. 노인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참회했다. 죽음을 앞둔 듯 비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패배자’라고 말하는 이 남자. 1984년 영화 ‘아마데우스’ 속의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 살리에리다. 그리고 그가 이길 수 없었다고 털어놓은 주인공은 바로 독일 잘츠부르크 출신의 작곡가 모차르트였다. 자신의 곡을 변주곡으로 더 멋지게 연주한 모차르트 앞에서 한 평생 열등감만 키웠다. “그는 1인자 나는 2인자”라고한 그는 결국 불후의 명곡도, 불후의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졌다. 》

1등보다 더 떵떵거리는 2등, 그들이 사는 법

그로부터 185년이 지난 2008년 한국.

살리에리의 후예들이 고개를 추켜올렸다? TV를 켜면 “야야야”를 외치며 1인자들을 위협하는 개그맨 박명수가 있다. 인터넷에선 정조의 ‘오른팔’로 불리는 홍국영(탤런트 한상진)이 드라마 ‘이산’에서 남긴 어록이 인기 검색어로 꼽히고 있다. 서점에는 1인자를 만든 2인자들을 소개한 책이 선보인다.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한나라당에서는 “내가 2인자”라며 외치는 의원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1’보다 나은 ‘2’의 시대인가? 아니면 2의 반란인가?

21세기 2인자들은 살리에리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기, 1인자 못지않게 떵떵거리며 사는 2인자 4명을 모셨다. 모두 30대 끝자락에 서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

과연 ‘2인자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감은 누굴까?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2인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을 각각 인터뷰하며 알아봤다. 그 전에 잠시 외쳐 보자. 자자, 1인자는 가라! 1인자는 가!

# 기호 1번… ‘야야야’당 대표 박명수

유재석은 ‘메뚜기’뿐… 제가 더 장수할 겁니다

▶ ① 나는 왜 2인자? ② 나의 주특기 ③ 내가 말하는 2인자란 ④ 나의 목표

① 박명수. 나이 38세. 1993년 MBC 개그콘테스트로 데뷔한 15년차 개그맨. 네 장의 앨범을 발표한 중견 가수이기도 하다. 가수 이승철의 성대모사, 쌍꺼풀 수술 등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의 위치는 ‘5인자’쯤 됐다. 하지만 MBC ‘무한도전’에서 ‘박거성’ 캐릭터로 성공한 뒤 현재는 다른 프로그램에서 메인 MC자리까지 차지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금의 2인자 신드롬의 주역인 그는 1인자 자리까지 넘볼 정도로 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2인자라 외치고 있다.

② 최근 그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눈물명수’. 지난달 말 열린 MBC 방송연예시상식에서 그는 ‘무한도전’ 멤버들과 함께 대상을 받은 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악마의 아들’로 불렸던 그지만 눈물도 흘릴 줄 안다며 사람들이 놀란 것. 하지만 이것은 잠시 쉬어가는 별명일지도 모른다. ‘눈물명수’는 ‘치킨명수’, ‘바다의 왕자’, ‘하찮은 형’, ‘흑채 개그맨 1기’ 등 그를 상징하는 수많은 별명 중 하나. 그도 이러한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만큼 웃음의 소재가 많다는 증거 아닐까요? ‘유재석’ 하면 메뚜기뿐이잖아요. 전 장수할 겁니다.”

그의 인기 비결은 뭐니 뭐니 해도 “야야야” 하는 ‘호통’이다. 스스로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도 남들에게 호통 치는 그의 뻔뻔함이 젊은 세대에게 카타르시스를 유발했다. 스스로 큰 별이라며 붙인 별명 ‘거성(巨星)’은 이런 그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다.

③ 개그 인생 15년 동안 한 번도 1인자가 되지 못한 그는 나름의 ‘2인자 예찬론’을 주장하고 있다. ‘대단한’ 2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받아 주는 1인자 유재석이 옆에 있기 때문. 오늘도 ‘1인자’ 옆에 붙어 호시탐탐 빈틈을 공략하고 있다. 마치 ‘살쾡이’처럼 그는 오늘도 이른바 ‘1인자 견제론’을 주장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가고 있다.

“지금의 2인자 캐릭터는 나 혼자 만든 게 아니랍니다. 1인자인 유재석 씨나 동료인 지상렬 씨 등이 없었다면 지금의 박명수도 없었죠. 절 보고 웃어 주는 것만으로 고맙다고 생각해요. 난 개그맨이니까요.”

④지금의 인기를 느낄 틈도 없이 그는 여전히 새로운 2인자론을 쓰고 있다. 어릴 적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을 빌리자면) 개그맨 김정렬이 무대에서 ‘숭구리당당’ 춤을 추는 걸 보고 “야 저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니…”라며 그는 꿈을 바꿨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른 말을 한다. “‘숭구리당당’을 추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젠 알겠다”고. 그것은 데뷔 15년 만에 2인자 자리에 올라온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1등을 하는 것보다 언제 전성기가 찾아오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처럼 30대 후반에 전성기가 찾아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애들부터 어른까지 절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앞으로 40대 초반까지는 끄떡없지 않을까요?”

# 기호 2번… ‘안타’당 대표 양준혁

홈런왕 이승엽? 안타왕은 바로 나

① 양준혁. 나이 39세. 1993년 데뷔 후 15년이 지난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왕고참’ 프로야구 선수. 앞다리를 벌리는 독특한 타격 폼으로 주목받은 그는 그해 신인상까지 받으며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그러나 데뷔 초 그는 0.393의 타율과 196안타, 84도루를 성공시킨 해태 타이거즈의 이종범 선수 벽에 부딪혔다. 또 이 선수가 일본 진출로 자리를 비운 후에는 ‘홈런왕’ 이승엽 신드롬에 가렸다. 15년 동안 두 번을 제외하고 13번이나 3할 타율을 유지했지만 정작 그에게 붙은 꼬리표는 ‘만년 2인자’.

하지만 서른여덟 살인 지난해 그는 2000안타를 비롯해 15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세 자릿수 안타, 최고령 20홈런―20도루 등 많은 기록을 쏟아냈다. 데뷔 15년의 경력이 쌓인 후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2000안타 기록을 세우던 날 친구와 후배들을 불러서 기념으로 케이크 한 번 자르고 끝냈어요. 성취감에 취할 겨를 없이 또다시 새로운 역사를 써야 했으니까요.”

② 그의 성공 무기는 첫째도 꾸준함, 둘째도 꾸준함이었다. 1인자들에 가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할 때도 그는 “부상당하지 않고 오랫동안 활동하면 언젠간 알아줄 것”이라며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지금은 “꾸준히 오래 한 사람에겐 1인자도 못 당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야구 시즌이 아닌 지금도 전담 트레이너와 함께 체력 훈련을 하고 있고 여전히 점심은 스테이크를 먹으며 체력 유지를 하고 있다.

③ 188cm, 95kg인 이 거구에게도 2인자의 설움이 없을 리 만무하다. 그는 “승엽이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갔던 시절 나는 거의 말도 못할 만큼 서러웠다”고 말했다.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는 사람.’ 그것이 그가 말하는 2인자였다.

하지만 그는 2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부터 삶이 바뀌었다.

“전 홈런 20개에 타율 3할 정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했었죠. 그런데 승엽이는 홈런 54개 친 다음 해 갑자기 폼을 바꾼다고 하더군요. 그 후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는 걸 보면서 깨달았죠. ‘열심히 했는데 왜 2인자일까’ 한탄하는 와중에도 1인자는 안주하지 않고 계속 연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④ 3000안타 고지를 향해 그는 오늘도 연습을 하고 있다. 내년이면 마흔이지만 그는 7년 안에 기록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제가 믿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꾸준함 하나뿐이죠. 끝까지 살아남는 것. 그것이 바로 궁극의 1인자 아닐까요?”

기호 3번… ‘비난’당 대표 김구라

막말 비난… B급 이미지는 나의 힘

① 김구라. 본명 김현동. 나이 38세. 1993년 SBS 개그맨 공채 2기로 데뷔한 방송인. 팝 칼럼니스트를 꿈꿨지만 2000년 이후 동료 방송인 황봉알, 노숙자 등과 함께 연예인, 정치인 등 주류 문화를 씹는 ‘B급 인터넷 방송’의 진행자 김구라로 변신했다. 이때 배운 비난과 욕설이 지금의 이미지를 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그의 2인자 이미지는 바로 B급 문화, 언더그라운드 문화라 할 수 있다. 현재 고정 출연하는 프로그램만 6개인 그는 섭외 0순위의 2인자 중 한 명.

“3년 전 어느 잡지 매체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가 저보고 ‘불쌍하다’며 딱하게 쳐다보더라고요. 일도 별로 없고 변변찮아 보여서 그랬나 봐요. 전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바빠진 것도 아니고 가식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장기도 여전하죠.”

② 그의 주특기는 간단하다. ‘막말’과 ‘비난’. 동료 개그맨 김경민에게 방송 중에 욕을 하고 ‘이혼남’인 선배 개그맨 김국진에게 과거를 캐묻는 등 수법도 다양하다. 하지만 신세대들에겐 이런 모습이 오히려 그의 ‘개인기’라 평가받는다.

“권위가 무너진 시대잖아요. 거칠고 직설화법을 쓰는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죠. 1970년대 ‘딥 퍼플’ 음악이 최고로 시끄럽다고 평가받았는데 지금은 그냥 평범한 것처럼… 과거 코미디 무대의 주류였던 서경석, 이윤석 등이 요즘엔 교양에 더 어울린다고 해요. 지금보다 더 거친 세상이 오면 그땐 저도 교양인이 돼 있겠죠.”

③ 그에게 1인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설움을 묻자 “2년 전만 해도 2인자는커녕 3인자도 못 됐다”고 말했다. 2인자의 설움도 느낄 새 없이 방송에 몸을 맡기며 살아온 셈이다. 그는 갈수록 2인자들의 힘이 세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옛날처럼 한 사람에게 초점이 모아져서는 일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도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 6, 7명이 함께 만들어가죠. 다양한 2인자들이 있어야 1인자도 빛날 수 있답니다.”

④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유재석, 강호동 같은 1인자 이미지보다는 B급 2인자 이미지를 고수하며 오랫동안 남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도 막말을 던지는 김구라는 스스로를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시간 약속이나 사소한 것 안 지켜서 욕을 먹는 게 가장 싫단다. 왜일까? ‘김구라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적어도 실생활에서만큼은 B급 양아치가 되면 안 되죠.”

기호 4번… ‘조연’당 대표 김상호

내 손에 차기작 시나리오 5개야

① 김상호. 나이 38세. 1994년 연극 ‘종로 고양이’로 데뷔한 14년 차 배우. 이후 10년간 무명 생활을 하다 2004년 영화 ‘범죄의 재구성’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뒤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영화 ‘즐거운 인생’에서 기러기 아빠이자 드러머 ‘혁수’ 역을 맡아 28회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까지 거머쥐었다. 인생 37년을 통틀어 처음으로 받아보는 ‘2인자’ 상이었다. 현재 그의 손 안에는 달라진 그의 위상을 실감케 하는 5개의 차기작 시나리오가 있다. 역할은 모두 조연이지만 대사는 몇 배로 늘어났다. 이문식, 유해진 등의 뒤를 이어 영화계 대표 2인자로 거듭나고 있는 중일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에휴∼ 문식이 형이나 해진이는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저도 대단하긴 하죠. ‘대머리가 단단하다’는 뜻에서는… 하하.”

②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미지수다. 얼짱 몸짱과는 동떨어진 대머리 배불뚝이 아저씨인 이 배우가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전 자신감 하나는 충만해요. 스스로 ‘넌 언젠간 분명히 될 거야’라고 다짐했는데… 2인자든 3인자든 자기만 즐겁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에 설움도 느끼지 못했죠. 그래서 감독님이나 선배 연기자들도 ‘쟤는 시키면 다해’라고 했죠.”

③ 설렁설렁 산 것 같다고? 그에게도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처절했던 순간이 있었다. 1992년 군 제대 후 고향인 경북 경주에서 서울 대학로로 무작정 상경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극 무대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12만 원 하던 월세를 못 내 주인에게 쫓겨났고 밥값도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는 따뜻한 방 하나 얻기 위해 연기에 매달렸다. “차라리 사업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조연이 얼마나 좋은데요. 주연보다 주목 받지는 못 하지만 무대 앞에 서 있는 1인자 뒤에 서서 그들이 뭘 잘했는지 잘 못했는지 다 볼 수 있잖아요. 2인자는 ‘1인자 메이커’로서 가치가 있는 거랍니다.”

④ 그는 최근 2인자들이 주목받는 것에 대해 “사회가 다양해졌고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졌다”며 “갈수록 1인자, 2인자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목표도 대폭 수정됐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우리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대단하죠? 대머리라서 단단하다니까요. 하하.”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