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왼쪽)가 11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총선기획단 임명장 수여식에서 전날 박근혜 전 대표의 공천 관련 발언을 비판하고 있다. 박 전 대표 측과의 공천 갈등을 의식한 듯 이방호 사무총장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안철민 기자
朴 전대표측 “살생부 밀실작업 증거있다”
강재섭 대표 “당대표로서 엄청난 모욕감”
“공천이 잘못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발언을 계기로 친(親)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세력과 박 전 대표 세력 간 공천 갈등이 전면전으로 번질 조짐이 보인다.
게다가 11일 당내에서는 처음으로 특정 의원들에 대한 ‘총선 살생부’ 논란까지 불거지기 시작해 자칫 공천 내분이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천 작업의 최종 책임자인 강재섭 대표는 전날 집단 회동한 박 전 대표와 그 측근들을 향해 “무리지어 수군대지 말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 총선 살생부 있나
총선 살생부 얘기가 터져 나오자 당에서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시각이다. 전날 박 전 대표와 측근들의 만찬에서도 “공천 위협을 느꼈다”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말들이 나왔다.
당내에서 떠돌기 시작한 살생부에는 구체적으로 영남의 A, B, C 의원, 수도권의 D, E 의원 등이 오른 것으로 거론되고 있다. 낙천 대상으로 거론되는 5명은 3선이 1명, 재선이 1명, 초선이 3명으로 ‘친이(친이명박)’ 계열 의원(영남권)도 한 명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일부 ‘친박(친박근혜)’ 의원 지역구에는 경선에서 이 당선인을 도왔던 한 인사가 이미 바닥 다지기 작업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들린다.
살생부에 오른 수도권의 한 의원은 경선과 대선에서 당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사라는 평가를 받았고 일찍부터 다음 공천이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 측 의원들은 “단순한 소문이 아니다. 밀실작업의 증거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며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표가 전날 “공천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저지하겠다”고 말한 것도 이런 살생부 논란에 대한 구체적 정황을 바탕으로 강력한 사전경고를 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반면 이 당선인 측 관계자는 “말도 안 된다. 총선기획단도 원내대표 추천 몫과 여성 몫을 빼면 친이와 친박이 3 대 3 아니냐. 공천에 대한 문제 제기는 결과를 보고 말해야 한다”며 “박 전 대표가 측근 의원들의 ‘인질’이 된 것 같아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 열 받은 강재섭
강 대표는 이날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당사에서 총선기획단 임명장을 수여한 직후 “아무 책임을 갖고 있지 않은 외부 인사들이 자꾸 공천 문제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박 전 대표와 측근들을 정면 비판했다.
강 대표는 “지금 당이 공명정대한 스케줄에 따라 사심 없이 일을 추진하고 있는데 자꾸 밖에서 당이 사당화된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당 대표로서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번 공천은 과거와 달리 대선 때문에 출발 자체를 늦게 해서 의도적으로 늦춘다고 오해할 필요가 없는데도 자꾸 그것을 기정사실화해 당을 공격하는 것은 불쾌하다”며 “당이 잘못했을 때 욕하고 비판하는 것은 좋은데 공정한 절차에 의해 시작하고 있는 마당에 시작도 하기 전에 선입관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정치공세”라고 역설했다.
이어 그는 “한나라당에는 계보 정치가 없다고 누구나 다 얘기했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무리 지어 수군대고 힘으로 하면 안 된다”며 전날 박 전 대표 측 회동을 겨냥했다.
강 대표는 그러면서 “총선기획단은 이 당선인 눈치도, 박 전 대표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 오직 국민의 잣대로 판단하고 결정해 달라”며 “공천심사위원회도 특정 세력의 대리인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 공천 갈등 어디까지 가나
‘친박’ 의원들은 또 이날 강 대표의 발언을 이 당선인에 대한 편들기로 간주하고 향후 대응 전략 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강 대표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표 측은 결사항전의 태도를 가다듬는 모습이다. 박 전 대표는 공천 문제와 관련해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하겠다”고 밝혔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박 전 대표 측은 일단 총선기획단의 활동 영역 및 기한을 대폭 축소할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지역별 여론조사 등의 업무는 당 공천심사위원회(공심위)로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당선인 측 관계자는 “총선기획단과 여론조사 모두 강 대표가 제안한 것이다. 박 전 대표 측이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면서 “2월에 공천심사를 하고 3월 초 공천 결과를 일괄 발표하는 일정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내에서는 공천 갈등이 더 악화되더라도 분당(分黨)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박 전 대표 측 일부는 “탈당도 불사할 수 있다”는 견해지만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은 내가 살린 당’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만큼 탈당은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다.
한 당직자는 “결국 친박 진영에 공천 지분을 적절히 배려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며 “공심위가 출범하면 양측의 막후 대화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