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주고는 다시 그것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더 이상 신이 주고 거두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의 먼 선조가 삽을 발명했을 때 인간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나무를 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끼가 발명되자 거두는 존재까지 될 수 있었다.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수 있으니까.”》
자연개발과 생태보호 공존의 길은…
미국 위스콘신의 황폐한 모래땅에 농장을 일구며 살던 저자. 여전히 매서운 2월, 땔감을 마련하려 어쩔 수 없이 참나무를 베며 생각에 잠긴다. 참나무의 나이테는 역사를 끌어안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말하는 역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와는 달랐다.
쓱싹쓱싹. 나무를 톱질할수록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1925년, 위스콘신에서 최후의 담비가 죽었던 해. 잎벌의 번식으로 낙엽송 수백만 그루가 말라죽었던 1910년. 쓱싹쓱싹. 1899년은 농장 북쪽에서 마지막 들비둘기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었다. 농장 남서쪽에서 야생 칠면조가 사라진 건 1872년의 일이다.
‘모래땅의 사계’는 이처럼 자연 속에서 자연을 깨닫는, 세월의 ‘로드 무비’다. 생태학자인 저자는 1년 동안 위스콘신 농장에서의 삶을 되짚어 가며 수필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러고는 위스콘신은 물론 일리노이와 아이오와, 애리조나와 유타 등에서 자행되는 환경 파괴 현장을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버림받은 모래땅에서 깨달은 가치는 담담하다. “스스로 깨닫건 깨닫지 못하건 간에 식물의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촉구한다.
장 시인이 이 책을 권유하는 마음 역시 저자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으로 내건 대운하 건설은 기대와 우려가 섞여 있습니다. 생태 환경은 수십, 수백 년 뒤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만을 따질 게 아니라 대운하가 생태에 미치는 영향을 꼼꼼히 따져서 사업을 추진하길 당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래땅의 사계’의 울림은 크다. 저자가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949년에 초판이 발행됐으니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녹슬지 않았다. 당시 저자가 지적한 눈앞의 경제 논리에 밀려 훼손되는 자연, 기본 합의조차 이뤄지지 않는 사회적 인식, 캠페인 수준에 그치는 정부의 환경정책 등은 지금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손에 삽을 들고 자연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성과를 자랑스러워한다. 삽은 많은 장점을 가진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것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성공적으로 그 삽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하고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래땅의 사계’는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과 비견되는 최고의 자연보호서 중 하나인 데다 문장도 유려하다. 잔잔한 성찰이 빚어내는 맛깔스러운 숙성미가 읽는 내내 혀끝을 감싼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왠지 쓸쓸하다. 자연에 갚지 못한 빚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인간은 또 어딘가를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