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에서 막 피어나는 꽃은 생명 탄생의 의지를 상징한다. 막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시를 쓰려는 시인처럼. 고은 시인이 직접 그린 작품이다.
지금 한반도의 서해안은 어디가 지옥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이제부터 모든 꿈은 지옥의 꿈에 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음악은 영혼의 방언이다. 음악은 지상에서 천상을 잉태한다. 이윽고 구원이다. 다른 구원이 거의 무효일 때의 마지막 구원이다.
눈 내리는 밤의 거문고 산조(散調)로 단번에 10년쯤은 산 느낌이 든다. 마음이 절로 이슥해진다.
저 수렵시대 조상들이 활시위에서 나는 소리로 하여금 활의 현악기를 만들어낸 원시의 영감은 무척이나 놀랍다. 그 누가 사냥도구인 활줄에서 현의 가락이 나올 줄 알았겠는가.
거기에 야자열매나 호리병박 따위를 달아 공명(共鳴)을 자아내기까지 한 그 6000년 전의 음악에 고개 숙여야 한다.
리라와 하프 반주로 서정시와 서사시가 나누어졌다. 오늘의 피아노도 따지고 보면 옛날 옛적 활시위의 후예인 것이다.
지난날 실크로드는 이런 악기들이 오고 간 곳이다. 고구려의 거문고나 우륵의 가야금도 그런 곳에 관련된다.
얼마 전 나는 몽골 고비사막의 새벽 마두금(馬頭琴) 소리를 들었다.
그런 다음 중국으로 가 그곳 56개 소수민족 중의 징(京)족 처녀가 연주하는 독현금(獨絃琴) ‘내가 너에게 갈 때’를 들었다. 나시(納西)족과 마오(猫)족 총각의 노래를 들었다.
마오족은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거쳐 북미 남미 대륙으로 건너간 인디언 인디오의 원조(元祖)이기도 하다.
이런 인류의 해묵은 자손들이 자신의 땅에서 고된 일 사이, 고된 일 뒤에 들려주는 연주나 노래 한바탕은 마른 눈에도 눈물방울을 매달게 한다.
눈이 비로 바뀌누나. 안개비로 바뀌어 내리누나.
이런 날은 바그너의 장광설이나 말러의 역류(逆流)보다 내버려진 변방 민족의 한 아낙네 콧노래 옆에 서 있고 싶다.
힘은 악일지 몰라.
문명의 시대를 순 도둑놈의 시대라고 말한 문명시대 구분론이 있다.
문명의 시대를 파괴의 시대라고 말한 문명론이 있다. 문명의 시대를 턱도 없는 오만과 무지무지한 탐욕의 시대라고 말하는 문명론도 어찌 없겠는가.
끝내 문명은 광기인가.
그러나 인간은 결코 이제까지 앞만 보고 저질러 온 문명 없이는 살 수 없다. 더 이상 문명이 없는 곳은 인간의 곳이 아니다. 인도 서북부 오지 라다크야말로 문명을 말하는 곳이지 문명 이전의 축복을 말하는 곳이 아니다.
내 살갗이나 오장육부나 뼈다귀로는 짐승으로 돌아갈 수 없다. 너무나 멀리 떠내려 와 있다.
앞으로 문명에의 절망으로 문명을 더 낳을 것이다.
문명은 운명이다. 아아.
웃는 얼굴을 보았다. 오늘 하루가 헛되지 않다.
티베트 고원지대 유목민의 한 가족이 고개 너머 낯선 곳으로 양떼를 몰고 떠나야 했다.
80세 노인을 헌 천막 안에 두고 늙수그레한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손자가 큰절을 올렸다. 노인과의 이별이다. 한 달쯤 먹을 것을 놓아두었다.
그 노인은 혼자 눈감을 것이다. 눈감으면 독수리들이 용케 내려와 그 말라빠진 주검의 육신이나마 요모조모로 다 파먹을 것이다.
이윽고 백골.
거기 무슨 말을 보태랴.
그런데 내가 사는 여기는 온통 웅성거리는 고령사회가 되었다. 옛날 궁한 시절의 고려장 따위는 아무도 떠올리지 않는다.
농촌에는 아예 50세짜리 ‘젊은이’는 눈 씻고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집 저집의 영감은 대개 70세 이상이고 80세 안팎의 할머니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모두 다 장수만을 외쳐댄다. 몇천 년 동안 수복(壽福)을 복의 으뜸으로 쳐 왔다. 베갯모의 화사한 수(繡)판에도 버젓이 그 수복의 권위가 정당화되고 있다.
어쩔 텐가.
늙으면 죽어 마땅하다고 나는 새삼 말하고 싶다.
더 살려고 발버둥치지 말아야겠다. 보약 먹고 골프 치고 아침저녁 바지런히 몸 놀려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하거니와 아예 그 치사한 목숨 연장 그만두어야겠다는 소리도 뒤따른다.
동해 끝 불로불사약을 가져오라고 보낸 진시황제의 서시(徐市)는 돌아가지 않고 사라졌다. 진시황도 어이없게도 일찍 죽어버렸다.
생명의 존엄은 반드시 생명의 길이와 별개이다.
20년 전 나는 최일남과의 대화에서 70세로 끝나고 싶다고 했다. 아직껏 면목 없이 살아있다.
고대 중국신화에도 상상의 동물이 득실거린다. ‘산해경’은 그런 요괴생물의 책이다.
아니, 12간지에는 실재의 동물이 아닌 용이 군림하고 있다. 장자의 곤(鯤)도 상상의 물고기이다. 그것이 붕(鵬)으로 바뀌어 하늘을 덮은 구름 크기의 날개로 9만 리를 날아오르는 것도 상상이다.
상상의 자유만이 자유라고 말하면 어떨까.
나 또한 지상에서는 박새도 되어 본 적 없건만 비행기 안에서 난데없이 붕이 되어 날아간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망상 공상도 상상의 이웃이다.
고도 1만 m 이상의 시베리아 서쪽 상공.
저 아래 노보시비르스크쯤의 어떤 집 유리창 반사광선이 내 좌석 창구멍으로 올라와 내 눈 안에 봉착(逢着)했다. 빛은 지치지 않았다. 눈부셨다.
그 눈부심은 곧 사라졌다.
지상의 광선과 비행기 속의 내 눈이 마주친 동안은 결코 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온 것은 부질없는 우연일 뿐인가. 지상의 누군가가 나에게 보낸 소식의 빛은 아닌가.
이를테면 시는 너처럼 문자에 얽매여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빛으로 쏘아 올리는 것! 너는 아직도 그런 시를 모르느냐는 꾸지람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상에 돌아가면 가장 불안한 문자로 된 시 한 줄 한 줄을 써야 한다. 살아있는 시와 시인은 불안이다. 생도 불안이다.
나는 이 불안 위에 막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 같은 시를 써야 한다.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