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분간 TV를 시청하기가 우선 편했다. 약간 느린 저음에 실려 나오는 말들은 쉬웠다. 표현에 꼬인 구석이 없고 표정에 여유가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어제 기자회견 분위기가 5년 뒤 퇴임 무렵까지 이어진다면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동시에 이명박을 상머슴으로 뽑은 국민도 성공한 국민이 된다.
추상명사보다 動詞가 많았다
당선인은 자신이 할 일에 대해 기자회견문 끝부분에서 정답을 말했다.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언제나 초심으로 국민을 섬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연설은 “감사합니다”로 끝난다. 하지만 어제 당선인의 ‘감사합니다’에는 의례(儀禮) 이상의 항심(恒心)이 담겨 있기를 바란다. 길고 험한 난관을 자력(自力)으로 뚫고 대선 승리를 쟁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숱한 고비마다 국민이 덮어 주고 감싸 주지 않았다면 어제 그 자리가 없었을지 모른다. 앞으로 5년간 때론 민심이 모진 매를 들더라도, 그래서 한없이 섭섭하더라도 ‘감사하며 섬기겠다던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현직 대통령도 5년 전 당선 직후엔 여유를 보였다. 국민에게 감사할 줄도 알았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최고의 헌사(獻辭)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임기 초반 언젠가 “나에 대해서는 대통령인 내가 평가할 것이다”라고 말해버렸다. 민심을 하찮게 여기는 오만(傲慢)이 고개를 들면서 민심도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당선인은 어제 “정책을 이해(利害) 당사자와 전문가,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추진해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다짐을 지켜낸다면 ‘국민의 정부’라 외치지 않아도 국민의 정부요, ‘참여정부’라 자칭하지 않아도 (국민) 참여정부가 된다. 반대자들을 4000번 설득했다는 청계천 사업처럼 완강한 반대를 지지로 바꿔 내야 할 일이 실제로 적지 않을 것이다. 국민에 대한 설득 능력과 노력 없이는 실용적 리더십이 성공하기 어렵다.
지난 5년간의 노무현 대통령은 독선(獨善)도 문제였지만, 땀보다 수사(修辭)로써 나라를 너무 쉽게 주무르려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지 싶다. 요컨대 일보다 말이 앞섰다. 그러다 보니 추상명사가 자주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노 대통령은 그제 청와대에서 노사모 회원 300여 명을 만나서도 “노무현의 역사보다 노사모의 역사가 더욱 중요하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진정한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 같은 구름 잡는 말을 했다.
‘해야’를 ‘했다’로 바꾸는 게 리더십
‘실용주의 개혁으로 프랑스를 변화시키고 있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등장 이후 프랑스 정계에서 추상명사가 퇴조하고 있다.’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가 한 달 전 이렇게 보도했다.
어제 당선인의 회견에 추상명사가 적고 동사가 많았던 것은 다행이다. 이것부터가 이념 과잉의 좌파정권을 교체한 실익(實益)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당연한 ‘have to do(해야 한다)’가 많다고 해서 국민 삶의 질이 당장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did(했다)’가 필요하다. 현 정부는 ‘did’를 창출하는 데 무능했다.
당선인은 “변화는 정부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이 ‘정부부터 시작했고 성공했다’로 바뀌어야 진정한 긍정적 변화다. 당선인은 “민간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민간에게 돌려주고…, 일자리 창출과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해서도 이번만은 규제 개혁이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 되게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또한 설득과 결단을 통해 과거완료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자회견문 내용대로 ‘국민에게 변화를 요구하기 전에 공직사회가 먼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도록’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당선인 몫이다. 그러자면 가까운 데서부터 헌신과 희생이 불가피하다.
물론 국민도 찍어 준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에서 정부에 모든 것을 미루고 요구만 하는 태도로는 선진화 시대와 세계일류국가를 앞당길 수 없다. 대다수 국민이 정부에 지나친 기대만 갖는다면 경제와 민생의 정부 주도(主導)가 심해지고, 민간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 각계와 개개인이 법치(法治)와 시장원리를 능동적으로 실현하고,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실제로 하지 않도록 민의(民意)를 모아야 한다. 국민과 정부의 손발이 맞아야 한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