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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년-사랑의 詩]김춘수/네 모발

입력 | 2008-01-18 03:02:00


그녀의 모발은 그녀의 얼굴보다 비밀스럽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모발은 지극히 익명적인 뭉치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내밀한 사건이 없이는 세상의 모든 깜깜한 머리털 속에서 유일한 머리털, 고유한 이름을 가진 모발은 태어날 수 없다. 사랑의 대상을 향해 스미는 감각의 능력은 비슷비슷한 인상의 뭉치들 속에서 놀랍게도 미묘한 차이, 특별한 차이를, 그 유일한 고유성을 찾아내고 구원한다. 그녀가 떠나고, 여름이 가고, 그렇게 사라진 모발을 나는 내 빈 손끝에 남겨진 감각으로 피워 올린다.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너의 모발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너를 만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모발은 그녀의 얼굴보다 가깝다.

시인 김춘수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문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꽃’)를 우리는 이제 이렇게도 표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네 모발을 그리워할 때, ‘이 세상의 분꽃 하나가 하늘에 묻히리라’.

이 시에서 우리는 좀 엉뚱하게도 ‘사랑은 모발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의 몸짓과 영혼은 그녀의 머리로부터 자라 나와 그녀를 떠날 듯 바람에 흩날리는 저 규정할 수 없는 머리카락을 닮았다. 모발은 ‘하늘 높이 눈을 뜨고 불리우며 흐르고 있다’.

‘지금 아내의 모발은 구름 위에 있다.’ ‘아내는 모발을 바다에 담그고 눈물은 아내의 가장 더운 곳을 적신다.’ 이러한 구절들을 우리는 김춘수가 쓴 ‘이중섭’ 연작시 중에서 읽을 수 있다. 화가 이중섭은 바다 건너 도쿄에 있는 아내와 떨어져 살았다. 가난했고 많이 외로웠을 이 화가의 붓은 그리움에 밀려 아내의 모발처럼 어느 구름 위에 떠 있고 어느 바다에 담겼을까. 지금, 이중섭의 터치는, 김춘수의 이 노래는 누구의 가장 더운 곳을 적시고 있을까.

김행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