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2세에 소련과학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된 천재 물리학자는 자신이 과학자가 아닌 ‘반(反)체제 평화주의자’로 기억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 박사. 26세에 모스크바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론물리학자로 20대에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제어열핵융합의 기초를 마련했다.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여념이 없었던 옛 소련은 이 젊은 과학자에게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줬다.
하지만 냉전 체제에서 국가의 욕망과 개인의 양심은 양립하기 어려웠다. 사하로프 박사는 1961년 대기 중에서 100Mt(메가톤·1Mt은 TNT 100만 t의 폭발력)급 열핵폭탄을 시험하려는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의 계획에 반기를 들었다. 누구보다 방사성 낙진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사하로프 박사는 계륵(鷄肋) 정도였다. 소련은 그가 없는 핵물리학을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사하로프 박사가 1968년 세계열강의 핵무기 감축을 촉구하는 에세이집 ‘진보, 공존, 지적인 자유(Progress, Coexistence, and Intellectual Freedom)’를 서방세계에서 출간하고 2년 뒤 소련인권위원회를 창설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그는 이미 물리학자에서 저항 운동가로 변해 있었다.
1975년 사하로프 박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집요한 방해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어 1980년 오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거하다 볼가 강변의 공업도시인 고리키로 강제 유배되면서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그는 유배 기간에도 4번이나 단식을 하며 고독한 투쟁을 벌였고,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에는 반체제 인사 석방과 인권 보장을 주장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3년 뒤 협심증으로 타계했다.
오늘날 러시아는 그의 소원대로 개혁과 개방을 넘어 민주주의로 접어드는 단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전체주의가 있던 자리는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는 민족주의가 먼저 차지할 태세이고, 사회주의가 떠나고 난 공백에는 왜곡된 자본주의의 역한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사하로프 박사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진보와 공존, 지적인 자유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릴지 궁금하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