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풍속화처럼 소시민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한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87×216cm·2000년). 2월 24일까지 로댕갤러리에서 열리는 ‘나의 아름다운 하루’전에서 볼 수 있다. 현대 도시인의 일상을 살펴보는 이 전시에는 한중일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 삼성미술관 리움
‘오노레 도미에-파리의 풍자꾼’전에서 선보인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 판화 중 하나(1839년). 도미에는 물을 무서워하는 아들의 손을 잡아당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정겹게 표현했다. 31일까지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도미에전에는 석판화와 조각 등 159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사진 제공 서울대 미술관
‘가시오이 4개가 1000원!’
대형 마트에서 이렇게 외치는 주부사원 한미숙. 국가대표 운동선수였지만 소속 팀은 해체되고 남편은 사업 실패. 집도 날리고 후배한테 얹혀사는 처지다. 온갖 시련에도 기죽지 않는 미숙. 상대팀 선수를 보고 ‘쟤도 심하게 오래 뛰네. 빚 엄청 있나 보다. 누구처럼’이라고 말하는 여유도 잃지 않는다.
대통령 당선인도 눈물을 흘렸다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주인공이다. 내게는 이 영화가 스포츠와 삶에서의 ‘훌륭한 패배’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선수들이 몸담은 일상에서 치열한 감동을 길어 올린 점이 신선했다. 끝이 안 보이는 터널 같은 현실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미숙의 삶에서 관객들은 스스로의 팍팍한 일상이 지닌 묵직한 의미와 가치를 새삼 돌아보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오노레 도미에-파리의 풍자꾼’전은 그런 일상의 힘을 느끼게 하는 전시다. 교과서에 실린 ‘삼등열차’란 그림 덕분에 도미에(1808∼1879)란 이름은 낯설지 않다. 화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열린 이 전시에선 그를 유명하게 만든 정치풍자화와 더불어 19세기 파리 시민들의 일상을 보여 주는 석판화를 만날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올라 골머리를 앓고, 자녀 교육에 전력투구하는 사람들…. 당대 생활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록한 작품들은 오늘날 서울 생활과도 다르지 않아 미소를 자아낸다.
잔잔한 일상의 총합이 삶이라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경구도 수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현대 미술가들이 시각적인 관찰자이자 증언자로서 그동안 예술에서 홀대받던 일상을 품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기 때문이다. ‘잠재적 창조성을 지닌 예술 영역’으로 일상이 각광받는 단계를 뛰어넘어, 변기(마르셀 뒤샹의 ‘샘’)나 비누 상자(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처럼 일상 속 사물마저 당당히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시대다.
로댕갤러리의 ‘나의 아름다운 하루’전은 도미에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의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전시장 초입에서 만난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 신도림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의 승객들, 창문 밖으론 도시의 하루 풍경이 펼쳐진다.
예전 TV 외화에 등장한, 코끝을 찡긋거리며 마술을 부리던 사랑스러운 ‘지니’를 기억나게 하는 정연두의 ‘내 사랑 지니’도 마음을 끈다. 평범한 사람들의 현재와 그들의 작은 꿈이 이뤄진 모습을 차례로 보여 준다. 영사 기사가 전투기 조종사로,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극지 여행가로 변해 가는 사진을 통해 관람객들은 마음 속 꿈이 이뤄지는 ‘마법’의 과정을 체험한다.
물론 꿈을 이룬 사람도 어김없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법은 짧고 일상은 기니까. 그렇다고 어깨 처질 필요는 없다. 세계가 열광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지막 장면. 2남 1녀를 둔 가장이 된 해리가 호그와트학교로 떠나는 두 아들을 기차역에서 배웅하는 일상으로 막을 내린다. 마법사들이 그토록 격렬한 투쟁을 통해 얻고자 꿈꾸던 것. 그게 다름 아닌 ‘머글’(마법사가 아닌 사람)의 일상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작품을 통해 일상을 응시해온 화가가 즐겨 인용하는 말이 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소한 일을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사소한 일로 괴로워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러므로 ‘생애 최고의 순간은?’ 하고 누가 묻는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다. 오늘의 일상을 살아낸 힘이 한 생을 사는 힘이기도 하다.
때로는 막막하고, 때로는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한 일상. 그래도 ‘모든 존재가 아름다운 이유는/꽃잎의 날보다 두엄의 날들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반칠환의 시 ‘화엄, 두엄’) 하지 않는가. 마술지팡이도 없이 맨몸으로 두엄의 나날을 건너가는 일, 그것도 평범한 우리에겐 가장 빛나는 성취가 아닐까.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