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국무장관 자리를 부탁하면 수락하시겠습니까? 내일 오전 9시 대통령이 전화를 하면 받으실 수 있습니까?”
미국 국무장관 하마평에 오른 뒤 기회를 놓칠세라 물밑 작업을 하고 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에게 1996년 12월 4일 드디어 백악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 행여 전화벨 소리를 놓칠까봐 샤워도 거른 채 거실에서 기다렸다. 약속대로 대통령은 전화를 했고 이듬해 1월 22일 상원은 99 대 0으로 그의 임명을 인준했다.
올브라이트의 국무장관 취임은 여러모로 드라마틱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이자 여성으로서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체코 망명자의 딸로 태어나 닷새간의 뱃멀미를 참아가며 1948년 11월 뉴욕에 도착해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에야 시민권을 손에 쥐었던 ‘이방인’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요세프 코르벨은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유고와 영국 등을 전전하다 미국으로 망명해 덴버대 국제대학원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그의 애제자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탐욕스러운 제자’는 올브라이트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국제 문제에 관해 토론하기를 즐겼던 그는 웰즐리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결혼 후 세 딸을 낳아 기르면서도 컬럼비아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인맥을 만들며 기회라면 오는 대로 잡았다.
39세가 되던 해 에드먼드 머스키 민주당 상원의원의 수석 입법보좌관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의 추천으로 백악관 참모를 거쳐 빌 클린턴 행정부 때 유엔 대사로 일하는 등 민주당의 거물로 성장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가장 불행했던 순간’으로 1982년 남편이 이혼을 통보했던 때라고 적었다. 남편은 “당신보다 더 젊고 예쁜 여자를 사랑한다”며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했다. 하지만 남편이 짐을 싸서 나간 그날에도 그는 브레진스키와의 점심 약속을 지켰다.
‘껍질 없는 계란’ 같은 불안을 가슴에 품고 살았지만 장관이 된 뒤에는 “결혼생활을 계속 했더라면 그렇게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힐러리 클린턴 대선 후보를 도와 11년 전 자신이 세운 ‘최고위직에 오른 여성’이라는 기록을 갈아 치우려 하고 있다. 그를 국무장관으로 강력히 밀었던 사람이 바로 대학 후배인 힐러리였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