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되기엔 너무 이르잖아? 최근 “시사 주간지 타임이 영화 사상 최고의 의상으로 올해 골든글로브 작품상 수상작 ‘어톤먼트’에서 키라 나이틀리의 드레스를 선정했다”는 보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새틴 소재의 에메랄드 그린빛 드레스는 물론 아름다웠다. 그러나 ‘역사상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기엔 영화가 너무 최근작이다.
알고 보니 이건 영국의 위성방송과 패션 잡지에서 실시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의상’ 온라인 투표였다. 타임은 이를 인용했다. 대중은 최신작에, 또 영국 여배우인 나이틀리에게 정이 갔을 거다. 어쨌든 이 드레스는 이를 계기로 또 하나의 ‘클래식’이 됐다.
그 외에 거론된 의상들은 진정한 클래식이다. 먼저 ‘7년 만의 외출’ 메릴린 먼로의 시폰 소재 홀터넥 드레스. 지하철 환풍구의 바람에 치마가 확 올라가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하얀 페라가모 샌들 위로 훤히 드러난 다리는 그를 ‘섹스 심벌’로 만들었지만 먼로는 이 때문에 보수적이었던 두 번째 남편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크게 싸우고 이혼했다.
다음은 오드리 헵번의 새틴 블랙 드레스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첫 장면. 이 드레스에 블랙의 긴 장갑과 선글라스를 낀 그는 뉴욕 티파니 매장 쇼윈도의 보석을 바라보며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아침을 먹는다. 위베르 드 지방시를 세계적 디자이너로 만든 이 드레스는 2006년 경매에서 영화 의상 사상 최고가인 8억5000만 원에 팔렸다.
풍성하고 하늘하늘한 화이트 드레스는 육감적인 몸매에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백치미의 표상이었던 먼로를 위한 옷이었다. 오밀조밀하면서 우아한 조각 같은 얼굴에 깡마른 헵번에겐 절제된 선의 블랙 드레스가 최고였다. 이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이들의 닮은꼴 여배우인 스칼릿 조핸슨(먼로)과 내털리 포트먼(헵번)도 각각 화이트와 블랙을 입었을 때 제일 예뻐 보인다.
이 밖에도 조사에선 ‘타이타닉’ 케이트 윈즐릿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비비언 리의 드레스, ‘애니홀’ 다이앤 키튼의 팬츠와 넥타이 등이 뽑혔다.
이 의상들이 ‘전설’이 된 것은 단지 예뻐서가 아니다. ‘영화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 영화로 옷을 배웠어요. 영화에서 시대적 배경 및 상황과 인물의 심리에 맞는 옷이 나올 때 비로소 옷의 가치가 진정으로 느껴져요.” 국내 최고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으로 영화 의상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 서은영 씨의 말이다. 그의 ‘최고’에는 비비언 리의 드레스를 비롯해 ‘아웃 오브 아프리카’ 메릴 스트리프의 사파리룩, ‘보니 앤드 클라이드’ 페이 더너웨이의 베레모와 주름 스커트, ‘화양연화’ 장만위(張曼玉)의 치파오 등이 들어갔다. 어디 이것뿐인가. ‘귀여운 여인’ 줄리아 로버츠의 브라운 바탕에 화이트 도트 무늬 드레스,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의 화이트 민소매 드레스…. 그들이 입으니까 예쁜 거라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헵번이 보석을 살 수 있어서 쇼윈도를 쳐다본 건 아니다. 때로는 그냥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것들이 있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