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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90년 美블라이 72일간 세계일주

입력 | 2008-01-25 03:00:00


1889년 미국 뉴욕의 신문사 ‘뉴욕월드’ 편집국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스물네 살의 여기자인 넬리 블라이가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처럼 지구를 한바퀴 돌겠다는 당찬 취재 계획을 낸 것.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여자니까 보호자가 필요해요. 설령 혼자 떠나더라도 무거운 짐 때문에 굼뜰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영어밖에 못하잖아요. 남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남자를 보내세요. 난 같은 날 다른 신문사를 위해 출발하고 그 남자보다 반드시 먼저 돌아올 겁니다.”

그의 고집은 통했다. 블라이는 1889년 11월 14일 오전 9시 40분 증기선 ‘오거스타 빅토리아’호를 타고 홀로 대서양 너머 영국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72일 6시간 11분 만인 1890년 1월 25일. 예정보다 3일 앞당겨 지구를 한바퀴 돈 그가 뉴욕에 다시 나타났다. 최단기간 세계일주 기록이었다.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향한 그는 쥘 베른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어 수에즈 운하, 실론 섬, 싱가포르, 홍콩,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건넌 뒤 미국 대륙을 기차로 횡단했다.

그는 사회적 금기에 굴복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여기자에게 패션, 정원 가꾸기 등의 ‘특화된 취재’만 주어지던 당시에 멕시코 특파원을 자청하고 그곳 정부의 언론 탄압과 비민주성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기자로서 명성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정신병동에서 10일’이라는 책과 기사. 미친 척하며 정신병원에 잠입한 그는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자행되는 인권 유린 실태를 낱낱이 폭로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말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환자들, 상한 음식과 폭력이 일상화된 병원의 실상은 미국 사회를 놀라게 했다.

서른 살에 마흔네 살 연상의 사업가와 결혼하고 기업인으로 변신한 그는 사업 실패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58세에 폐렴으로 숨지기 전까지 보육원을 운영하며 자선 사업에 몰두했다.

평생 보이지 않는 ‘유리벽’과 싸워 온 그의 일생은 뮤지컬로 각색돼 미국인의 가슴 속에 남았다. 미국 정부는 2002년 ‘여성 저널리스트’ 우표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그를 택했다.

“올바른 방향으로 에너지를 집중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믿었던 블라이. 나약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 일을 원한다면 넌 할 수 있어. 문제는 네가 진심으로 그 일을 원하느냐지.”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