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성당의 빈방을 빌려 피정을 한 적이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별수 없이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니 손이 얼어붙는 것 같고, 머리를 감으니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찌르는 것 같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찬물에 머리를 감고 나니 너무나 시원하고 상쾌하다. “따뜻한 사제관에 와서 머리를 감지, 웬 궁상이냐”는 동창 신부의 질책이 즐겁게 들렸다. 그러한 따스함을 바랐다면 내가 사는 곳을 떠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난방이 잘되는 피정 집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찬물에 머리를 감아야 하고, 수도가 얼까 봐 수도꼭지를 밤새 틀어 놓아 졸졸졸 물소리가 나야 하는 그곳이 그리워서 갔던 것이다.
찬물에 머리를 감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겨울을 겨울처럼 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겨울을 겨울처럼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것이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하고,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 ‘시원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은 우리에게 쾌적한 생활환경을 보장해 줄지 몰라도,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근심과 걱정을 안겨 주는 법이다.
오늘 아침 또다시 찬물에 머리를 감았다. 하지만 맛이 달랐다. 시골집과는 달리 방안의 따스함이 세면실까지 전해져서, 차가움은 느껴지지만 견딜 만하고,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찌르는 힘겨움도 없다. 춥지 않고, 힘들지 않고, 어렵지 않게 살려고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공짜가 없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기에, 그만큼 우리의 근심도 늘어 왔는지 모르겠다.
가지고 싶어 하고,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말이다, 가끔은 우리가 겨울을 여름처럼 만드느라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여름을 겨울처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근심과 걱정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 가끔은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살아보자.
찬물에 머리를 감으면서 다시금 생각한다. 여름은 여름답게, 겨울은 겨울답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주십사 하고 말이다.
최성우 신부·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