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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달랑 집 한채...'가난한 부자'의 하소연

입력 | 2008-01-31 17:13:00


"너 지금 우리 약 올리는 거냐? 그런 말 누가 믿겠어?"

공기업을 퇴직한 한 모 씨(56)는 지난해 오랜만에 나간 동창모임에서 자신의 답답한 처지를 하소연했다가 친구들로부터 되레 이런 핀잔만 들었다.

그는 20년 전 4000만원을 주고 구입한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금 시가는 약 12억원.

하지만 한씨에게 시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한씨에게 이 아파트는 20년간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정든 동네 익숙한 집일뿐이다.

그의 소득은 매달 100여만 원의 연금이 전부. 금융자산은 2000만원 정도다.

하지만 한씨는 지난해 종합부동산세(종부세)로 500여만 원을 냈다. 연간 받는 연금 1200여만 원에서 종부세를 뺀 나머지 700여만 원 정도, 즉 한씨의 월수입은 사실상 60만원 정도였던 것이다.

이 상태로는 노후자금은 고사하고 대학생인 딸을 시집이라도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사 가면 될 거 아니냐?"

친구들이 입을 모았지만 이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멍가게, 우체국, 은행, 이발소, 호프집….

남들은 '배부른 고민'이라고 하겠지만 노년의 한씨에게 20년 단골이 즐비한 정든 동네를 떠나라는 것은 이민 가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너희 정말 너무한다…. 친구 고민에 그 정도로 밖에 대꾸를 못하니?"

한씨는 못내 서운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먼저 일어섰다고 한다.

●"종부세 내기 위해 적금 들어"

한씨는 전형적인 강남지역의 '가난한 부자' 중 한 사람이다.

이 지역에서는 실제 소득에 상관없이 아파트 한 채만 갖고 있어도 자산이 10억 원을 쉽게 넘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5월 현재 한국의 가구당 평균 총자산은 2억8112만원.

10억 원의 자산은 평균 보다 4배 가까이 많으니 자산기준으로만 보면 한씨는 부자가 맞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수준은 비참하다.

한씨만 해도 마음 놓고 장을 본 기억이 없다.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꾼다.

한씨는 그나마 민간기업보다 급여 수준이 낮았던 공기업에서 평생을 근무하며 검소한 생활 방식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그런 그에게 종부세는 '실형'이었다.

그는 지난해 1년간 "종부세 낼 돈을 마련하느라 연금의 일정액을 적금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종부세 대신 실형을 살라면 한 달이건 두 달이건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는 게 한씨의 심정.

국민은행 강남PB센터 권순희 차장도 "이런 분들은 부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역시 강남지역의 '가난한 부자'에 해당되는 김 모(47)씨도 주변에서 "힘들인 것도 없이 부자가 됐다"는 놀림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김씨가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10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도 그저 평범한 서민 아파트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집값은 3억원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학군이 좋고 재건축 대상이라는 이유로 가격이 10억 원대로 폭등해버렸다.

부동산 투기는커녕, 주식이나 펀드 같은 투자에 넣을 여유 돈도 없고, 그저 은행에 조금씩 적금이나 예금을 드는 게 김씨가 하는 재테크의 전부였다.

변한 게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듣게 된 '부자'라는 소리와 지난해 두 배나 많이 낸 보유세 밖에 없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한씨와 김씨 같은 가난한 부자 중 가장 힘겨운 경우는 은퇴해서 소득이 낮거나 아예 없는 장년층이다.

가난한 부자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많아진다. 본보와 현대경제연구원이 공동으로 '부자동네'로 알려진 서울의 강남, 서초, 송파 3개 구와 경기 성남 분당구의 주민 563가구를 대상으로 자산구조를 조사한 결과 가난한 부자의 비율은 40, 50대가 각각 26.5%, 60대의 비중이 40.7%인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 후 연금과 저축한 돈으로 살아온 최 모(71·서울 서초구 방배동)씨 부부는 20년 넘게 살았던 아파트를 팔아야할지 고민 중이다.

보유세를 감당하기도 어렵고 생활비도 필요해 아파트를 파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집을 팔아도 양도소득세를 내고 남은 돈으로 지금 사는 동네에서 살만한 집을 다시 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평생을 살다시피 한 정든 동네를 떠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왠지 늘그막에 쫓겨난다는 느낌도 든다.

집을 담보로 매달 노후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역모기지론'을 신청하려 했으나 이 마저 거부당했다.

역모기지론은 시가 6억원 이하의 주택에만 해당되기 때문.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최근 부동산 거래가 뜸해지면서 집을 내놔도 팔릴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는 것.

전문가들은 1주택을 갖고 있는 노년층에 대해서라도 보유세를 완화해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지적해 왔지만 지난 정권에서 이들의 지적은 '가진 자'를 성토하는 목소리에 묻혔다.

●"돈 맛 본 정부가 세수(稅收) 포기 하겠나"

가난한 부자들도 유일한 자산인 부동산을 팔고 금융자산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본보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6.3%가 자산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노후자금 마련(36.8%)과 생활비(28.9%) 마련, 종부세 등 세금마련(53,9%)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집을 팔지 못한다. 77.9%가 양도소득세 등 중과세에 대한 부담을 이유로 들었다.

부동산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집을 팔지 않고 버틴다는 대답은 10.1%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가난한 부자들은 세금 부담 때문에 집을 팔려고 하지만 세금 때문에 집을 팔지 못하는 이중의 덫에 발목이 잡혀 있는 셈이다.

앤트 세무법인 대표인 현성환 세무사는 "한국처럼 주택 거래 자체를 규제하려는 목적을 갖고 강력한 주택 관련 거래세를 도입한 나라는 없다"고 꼬집었다.

보유세도 마찬가지. 한국처럼 과세표준(기준시가)이 매년 변하고 이에 따라 보유세를 내는 나라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미국 주 정부들은 10년 전에 10만 달러에 산 집이 100만 달러로 올라도 샀을 때의 가격을 기준으로 보유세를 걷는다.

서강대 김경환(경제학) 교수는 "가난한 부자의 자구책은 현재로서는 집을 줄여나가는 방법 밖에 없는데 지금의 세제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가난한 부자들은 장기 보유 1주택자들에 대해 세금 부담을 완화하겠다는 이명박 당선인의 약속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한씨 등은 "막상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 권력 맛에 취하지 않겠느냐, 또 이미 돈 맛을 본 공무원들이 그 엄청난 세수를 쉽사리 포기할 수 있겠느냐"며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나성엽 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