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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90년 이창호, 조훈현에 첫 승리

입력 | 2008-02-02 03:00:00


1990년 2월 2일 오후 서울 한국기원 4층 특별대국실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조훈현 9단은 벌써 다섯 갑째 ‘장미’ 담배를 뜯고 있었다. 초읽기에 몰린 그는 “망했나? 망했어”를 중얼거리며 고심을 거듭했다. 상대는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송송 나 있는 당시 15세 소년 이창호 4단. 그는 담배 연기와 스승의 혼잣말에 동요하지 않고 정확하게 끝내기 수순을 밟았다. 마지막 반 집짜리 패를 잇는 순간 조 9단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흑을 쥔 이 4단의 반 집 승.

이 4단이 최고위전을 차지하며 조 9단의 아성을 처음으로 무너뜨린 순간이었다.

1980년대 조 9단은 무적함대였다. 그는 3차례나 모든 타이틀을 휩쓰는 전관왕을 기록했다. 동갑인 서봉수 9단이 가끔 반란에 성공했지만 중원을 호령하는 지존은 조 9단이었다. 조 9단보다 10년 안쪽의 어린 후배에선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조 9단의 시대가 최소한 20년은 갈 것이라고 했다.

조훈현 왕국의 균열은 내제자 이창호로부터 시작됐다. 수줍고 말 없던 이 소년은 1986년 입단해 3년 만인 1989년 최고위전 패왕전 국수전 등 3개의 도전권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경험 부족으로 조 9단에게 전패하며 쓴맛을 봐야 했다. 조 9단은 그해 말 상금 40만 달러의 응씨배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면서 왕국의 영광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1990년 벽두부터 시작된 최고위전 도전기에서 이 4단은 ‘조훈현을 넘기엔 최소 5년은 더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뜨리며 3승 2패로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 4단의 첫 타이틀이 최고위라는 것도 공교로웠다. 조 9단이 17년 전인 1973년 처음 차지한 타이틀도 최고위전이었던 것.

이때부터 ‘이창호의 신화’가 시작됐다. 1인자 조 9단을 한 번 넘은 이 4단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해 이 4단은 최연소로 국수위를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1인자에 올랐고 바둑계의 기록을 하나씩 갈아 치웠다.

1990년 이후 17년 만인 2007년. 이 9단은 슬럼프에 빠지며 1인자 자리를 이세돌 9단에게 넘겨줬다. 승부는 돌고 도는 것. 영원한 승자는 없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