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여름 ‘포린 어페어스’는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이 한 편의 논문은 1940년대 이후 이 잡지에 수록된 그 어떤 논문보다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논문의 주요 내용은 ‘새롭게 태동하는 세계 정치 구도에서 핵심적이고 가장 위험한 변수는 상이한 문명을 가진 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여기에서 헌팅턴이 전제한 ‘새롭게 태동하는 세계’란 냉전이 종식된 뒤의 세계를 가리킨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 추천》
1980년대 말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탈냉전 시대가 오자 사람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를 이데올로기로 가르던 세계 질서가 어떤 양상을 띠게 될지 궁금해하던 차에 ‘문명’을 화두로 내세운 헌팅턴의 예측은 큰 충격파를 던졌다.
3년 정도 논란을 지켜보던 헌팅턴은 이 논문에서 스스로 물음표를 찍으며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 이 책을 펴냈다. 1996년 출간된 책에서 그는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정치를 ‘다극화’와 ‘다문명화’로 특징지었다.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던 자리를 문명이 대신하며 문명에 기반을 둔 세계 질서가 태동한다는 것이 그가 강조한 책의 요지다. 국가들이 문명을 중심으로 뭉친다는 것이다.
헌팅턴은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중화, 힌두, 정교, 불교, 일본권 등 주요 문명권으로 세계를 구분했다.
그는 문명권으로 구분된 세계에서 서로 다른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과 집단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고 대립적 경향을 띨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문명의 갈등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으로 예측했다.
우선 국지적이고 미시적 차원에서 ‘단층선 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각각 다른 문명에 속한 인접국들 사이에서, 또는 한 국가 내에서도 다른 문명에 속한 집단들끼리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세계적, 거시적인 차원에선 서로 다른 문명에 속한 주요 국가들 사이에 ‘핵심국 분쟁’이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상되는 거시적 분쟁의 하나로 그는 서구 대 비서구의 양상을 꼽았다. 더 나아가 이슬람 사회와 아시아 사회, 이슬람 사회와 서구 사회 사이에 가장 격렬한 대립이 예상된다는 게 헌팅턴의 시각이었다.
12년 전에 출간된 이 책에서 헌팅턴이 얘기한 내용의 상당 부분은 이미 현실로 나타났고 곳곳에서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에 와선 새로운 내용이 없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현재를 짚어 보고 미래를 고민하는 이론서로선 여전히 유효하다.
다양한 문명과, 문명 간의 갈등을 다루긴 했지만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서구 문명에 대한 진단이다. 서구 문화의 보편성을 관철하려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노력과 현실적 능력 사이에서 생겨나는 부조화를 짚은 것이다. 그 근저에는 서구 문명을 우월하다고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미국의 보수파가 세계를 어떻게 재단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책”이라고 평가하고 “약소국이나 제3세계에서 보는 시각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상기하며 읽으면 대미 외교 정책을 펴는 데 여러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