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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6년 日록히드사건 美의회 공개

입력 | 2008-02-04 02:45:00


1976년 2월 4일 미국이 쏘아올린 원자폭탄급 뉴스가 일본으로 날아들었다. 이날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소환된 록히드사 간부는 항공기를 팔기 위해 일본 고위 관료들에게 200만 달러의 뇌물을 줬다고 증언했다. 그 ‘고위 관료’ 속에는 직전 총리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도 들어 있었다. 그는 총리로 있던 1972년 전일본항공(ANA)에 록히드 항공기를 구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주는 대가로 5억 엔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열도는 흔들렸고 일본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록히드 스캔들’의 서막이었다.

다나카 전 총리는 1974년 퇴임한 뒤에도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 정계를 막후에서 지배해 왔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몰락했다. 그는 1976년 7월 역대 총리 중 최초로 검찰에 구속됐고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최고재판소 확정판결이 나오기 2년 전인 1993년 뇌경색으로 사망해 다행히(?) 감옥에 가진 않았다. 그 대신 다나카 전 총리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정치는 돈과 머릿수’라는 말은 금권정치를 상징하는 표어가 됐다.

록히드사건은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1975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부정 선거자금 의혹을 캐기 위해 주요 기업들의 해외 계좌를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증권거래위는 록히드사가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이 엉뚱하게도 일본 관료들의 계좌로 흘러간 사실을 알게 된 것. 닉슨을 향했던 화살이 다나카를 맞힌 셈이다.

퇴장은 불명예스러웠지만 다나카 전 총리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도 드물었다. 니가타(新潟) 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공고 토목과를 졸업한 그는 태평양전쟁의 와중에 토목공사를 벌여 재산을 모았다. 그 재력을 기반으로 1947년에 정계에 진출해 1972년 총리가 됐다. 다나카 전 총리의 성공신화는 비천한 신분을 극복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비견됐다. 또 건설사 최고경영자(CEO) 경험에서 나온 추진력과 빠른 판단력으로 ‘컴퓨터가 붙은 불도저’라는 애칭도 얻었다.

이 사건으로 다나카 전 총리는 몰락했지만 그를 구속한 도쿄지검 특수부는 일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이 됐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토 시게키 전 검사총장이 말해 유명해진 ‘거악(巨惡)’을 넘어뜨림으로써 정치권의 예속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지난해 한국에서도 개봉된 ‘히어로’의 ‘구류 고헤이’라는 검사(기무라 다쿠야)의 역할도 일신의 영달을 돌보지 않고 거악의 정치인과 맞서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것도 ‘록히드 스캔들’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