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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20년 美해방노예 이주 시작

입력 | 2008-02-06 03:01:00


옷가지와 음식 보따리를 짊어진 흑인 86명이 미국 뉴욕의 부두에서 승선 순서를 기다렸다. 난생 처음 가보는 아프리카. 미국의 흑인 노예 중 처음으로 조상의 땅으로 되돌아간다. 배에 오르는 순간 농장의 고된 노역도, 백인들의 천시와 학대도 사라진다.

하지만 불안했다. 조상들이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땅에 끌려왔듯 이제는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고향 아닌 고향으로 가야 했다. 그들은 서로를 꼭 안은 채 백인들의 신인 하나님께 백인들의 언어인 영어로 기도했다. 1820년 오늘, 미국 정부의 해방노예 이주정책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은 흑인들의 저항과 북부 공업지역의 노예 해방 운동이라는 내부 갈등에 직면했다. 1790년 5만9000여 명이던 해방노예가 20년 뒤에는 18만6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백인들이 긴장했다. ‘검은 자유인’과 공존할 수 없다는 관습화된 편견이 대두됐다. 여기에 흑인 밀집 지역이 우범지대가 되고, 열등한 지적 능력으로 인해 건전한 시민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데다 백인들의 일자리를 잠식한다는 주장까지 쏟아졌다.

결국 연방정부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해방노예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백인의 시각에서 입안되고 추진된 이주정책은 해방노예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소형 상선 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아프리카 서부 시에라리온에 맨 처음 도착한 86명 중 3분의 1은 한 달이 채 못 돼 황열병으로 숨졌다.

생존자들은 원주민들의 위협 속에 초기 정착지에 갇혀있다시피 하다 이듬해 2차 이주단이 도착하자 남쪽의 ‘후추 해안’으로 터전을 옮겼다. 미국 정부도 지속적인 해방노예 이주를 위해 미국식민협회(ACS)를 창구로 삼아 토지 매입에 나섰다.

이주민들은 미국뿐 아니라 카리브 해 인근에서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1822년, 드디어 소수의 해방노예들과 다수의 토착민으로 구성된 흑인공화국인 라이베리아가 태어났다.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기도 한 라이베리아는 자유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배세력으로 자리를 굳힌 해방노예의 후예들은 1980년 정권을 잃을 때까지 원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남겼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