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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공천 전쟁’의 불씨 꺼졌는가

입력 | 2008-02-09 20:31:00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지난달 말 한나라당의 공천 갈등과 관련해 “정당에서는 정치가 법보다 위에 있다”고 말한 데 대해 대다수 언론이 별다른 논평 없이 지나간 것은 뜻밖이다. YS의 차남 현철 씨가 이미 18대 총선 출마 의사를 밝힌 터여서 ‘YS의 말씀’이 세인의 관심을 끌 만한데도 말이다. ‘조선일보’가 2월 4일자 사설에서 YS를 ‘한나라당의 한 원로 정치인’이라 지칭하고 “정치가 법 위에 있었던 노무현 정권의 폐해를 바로잡겠다고 외쳐대며 정권을 잡은 한나라당이 제 마당 안에선 계속 법 위에 정치를 모시겠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나마 눈에 띄는 비판이었다.

‘대장부 합의’라고요?

현대 민주주의국가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치를 실현하는 ‘법치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법을 정치의 수단쯤으로 여기는 ‘정치주의’는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YS가 ‘정치주의’를 옹호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YS는 ‘자식 구명(救命)’에 앞서 당내 공천규정을 두고 벌어지는 계파 간 갈등조차 정치로 풀어내지 못하는 한나라당에 쓴소리를 한 것이라고 믿는다.

교과서적으로 말한다면 법은 사회규범 가운데 국가적인 강제로 실현되는 규범으로 정의 실현을 이념으로 하며, 정치는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공천 갈등은 법(당규)에 앞서 정치(협상과 타협)로 푸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하기에 YS는 “정치가 법 위에 있다”라고 하기보다는 “법보다 정치로 풀어라”고 말하는 편이 나았다.

정치로 풀지 못하면 법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번 법대로라면 정치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반목의 비용은 결국 사회공동체 전체가 져야 한다. 예컨대 노무현 정부에서 빚어진 대통령 탄핵과 행정수도 이전 건이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정리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국가적 손실을 가져왔던가. 하물며 헌재가 자기편 손을 들어 주면 ‘위대한 헌법정신의 승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횡포’라고 했다. 정치의 부재(不在), 리더십의 빈곤이 낳은 소모적 갈등이다.

현 시점에서 전망한다면 ‘4·9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내 과반수를 점유할 것이란 예상도 과장이 아니다. 견제보다는 안정이라는 민의(民意)가 쉽게 흔들릴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총선 공천 경쟁률이 역대 최대인 4.8 대 1을 기록한 것도 그런 기대를 반영한다. 문제는 경쟁률이 높을수록 ‘공천 전쟁’이 재연(再演)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이달 초 다툼에서는 당규 제3조 2항(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정부패와 관련된 법 위반으로 최종심에서 형이 확정된 경우 공천신청 자격을 불허한다)을 “벌금형을 받은 경우는 괜찮고 금고형 이상을 받은 경우는 안 된다”는 탄력적 해석으로 봉합했다. 하루 만에 막을 내린 해프닝이라지만 당 대표는 사무총장에게 “뒤통수쳤다. 간신이다”라고 했고, 박근혜계는 “박근혜 죽이기와 공천을 승자(勝者)의 전리품으로 생각하는 비(非)민주적이고 천박한 사고”라고 아우성쳤다.

강재섭(대표)-이방호(사무총장)-김무성(최고위원)의 ‘대장부 합의’는 또 뭔가. 국민은 그들이 말하는 ‘의리’에 별 관심이 없다. 한나라당이 당규를 어떻게 해석해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경제 살리라고 대통령 뽑아주고, 국정 안정을 위해 총선에서도 밀어주겠다는데 고작 하는 짓이라니 원”, 그렇게 혀를 찰 뿐이다.

‘편싸움’ 더는 보기 싫다

정당에서 계파 간 경쟁과 견제는 있을 수 있고 그것이 건강하게 작동된다면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이명박계-박근혜계 다툼은 그렇지 않다. 정권이 공식 출범하기도 전에 ‘우리 편 사람 공천하기’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서야 되겠는가. 자파(自派)의 유불리에 따라 ‘출군(出軍)과 회군(回軍)’을 반복한다면 그건 정치도, 법치도 아니다.

YS의 차남 현철 씨는 결국 이번 총선 출마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을 수 없어서란다. 법이 정치의 우위에 선 것인가. 지켜볼 일이다.

전진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