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참사를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문화재 관리에 관한 당국자들의 빛 좋은 말들에 속이 상한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선조들이 물려준 소중한 문화유산의 온전한 보존, 전승, 활용’을 다짐하고 이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고도 했다.
‘문화재 보존’ 입만으로 하더니
유 청장은 조선왕릉과 공룡화석지의 세계문화유산 등록협의차 유럽에 갔다가 어제 귀국했는데 ‘말년 휴가’를 겸한 출장이었다 한다. 작년 5월에는 경기 여주군에 있는 효종대왕릉 재실 앞에서 LP가스통에 불을 피워 숯불구이 오찬을 하고도 “그게 무슨 문제냐”고 되받은 장본인이다. 유 청장의 이런 언행이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은 가정·학교·사회 교육을 통해 널리 일깨워져야 한다’는 문화유산헌장에 부합하는가.
문화재청 관계자는 어제 숭례문이 처참한 모습을 드러낸 뒤 “이번 화재를 계기로 문화재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방재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한다”고 말했다. 2005년 식목일 산불로 낙산사가 거의 전소되고 보물 중의 보물인 동종(銅鐘)이 녹아버리자 문화재청 측은 “똑같이 복원하면 큰 문제는 없다”는 뜻을 밝혔다. 한가하고, 무신경하고, 책임감이 실종된 태도가 절묘하게 겹쳐진다.
정부의 문화재 담당조직은 김대중 정부 2년차이던 1999년 문화관광부 외국(外局)에서 문화재청으로 승격됐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을 발효(3월)하고, ‘효율적인 재난 관리’를 전담할 중앙행정기관으로 격상된 소방방재청을 개청(6월)했으며, 안전관리헌장을 선포(11월)하고, 제1차 국가안전관리 5개년 계획을 발표(12월)했다. 이들 두 청(廳)은 숭례문 피해를 줄이지 못한 책임을 서로 떠넘기기에 바쁘다. 문화재청 당국자는 “문화재청 예산은 4800억 원밖에 안 되고 인원도 750명이 전부”라며 예산과 인력 부족 탓도 했다.
국(局)이 청으로 격상되건, 청이 부(部)로 승격되건 공무원들의 책임의식과 전문성 확보 노력이 없으면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 조직이 몸집을 키우는 것만으로 국민 생명과 재산, 그리고 국가 자원을 더 잘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수없이 배신당했다. 숭례문 참사도 그 하나다.
難題들의 시험대에 서는 李정부
재작년 서울시가 숭례문을 개방한 것은 ‘국보 1호를 시민 품으로’라는 명분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취지를 살리면서도 안전대책 등 문화재 관리에 만전을 기하는 보완조치를 병행했어야 했다. 설혹 ‘시티즌 프렌들리’ 행정이라 하더라도 선의(善意)만으로 부작용과 후유증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숭례문 화재는 국민이 함께 겪은 참변이지만, 이명박 정부에도 엄중한 경종이다.
역대 정부는 국정 원리니, 지표니 하면서 듣기 좋고 그럴듯한 거대담론(巨大談論)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모든 정부의 승부는 결국 구체적 각론에서 나고 말았다.
김영삼 정부는 어느 의미에서 독창적인 ‘세계화’를 선창(先唱)하기도 했고, 부자나라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조기 가입하는 추진력을 뽐내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초와 여름에 잇달아 터진 한보그룹 및 기아자동차의 부실화사태라는 구체적인 ‘경제 폭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국가부도위기를 재촉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對北) 햇볕(포용)정책은 평화 지향적이고 ‘내셔널리즘’ 정서에 부합한다. 하지만 두 정부는 북한의 핵개발을 제어하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조장함으로써 대북 정책에 실패했다. 재작년 북의 핵실험은 한마디로 포용정책에 대한 사형집행과 다름없다.
이제 이명박 정부 차례다. 경제에서의 시장과 기업 중시, 외교안보에서의 한미동맹 복원과 핵 폐기를 대전제로 한 대북 지원, 교육에서의 자율과 경쟁 추구, 국가 및 사회 운영에서의 법치 확립…. 이런 기본 노선은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고 있다. 그렇다고 총론에서만 맴돌 수는 없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여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공공개혁과 공기업 민영화의 구체적 현안을 적시(適時)에 해결할 수 있을지, 미국 중국과의 외교적 거리 조절을 얼마나 유연하게 할 수 있을지 등등 각론의 시험대에서 성공해야 한다.
불이 나도 못 끄는 ‘입만의 정부’ ‘퍼포먼스 프렌들리 정부’는 국민 누구도 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 영상취재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