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문고본
1909년 2월 12일. 신문관(新文館)이 ‘십전총서(十錢叢書)’의 첫 번째 책을 펴냈다. 십전총서는 단돈 10전으로 책 한 권을 구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값이 싸고 가지고 다니기에 좋은 책, 국내 최초 문고본 출간의 순간이었다. 십전총서는 크기가 세로 18cm, 가로 13cm로 요즘 문고본 판형(22.5×15.2cm)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문관은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1908년 창설한 출판사. ‘소년’ ‘청춘’ ‘아이들 보이’ ‘붉은 저고리’ ‘새별’ 같은 최초의 근대 잡지를 발행한 곳이다.
십전총서의 첫 책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번역본이었다. 54쪽짜리 이 번역본의 제목은 ‘걸늬버유람긔(葛利寶遊覽記)’. 아쉽게도 십전총서는 두 번째 책 ‘산수격몽요결(刪修擊蒙要訣)’이 나온 뒤 발간이 중단됐다. ‘격몽요결’은 율곡 이이가 한문으로 지은 어린이용 학습서고, ‘산수’란 ‘글을 다듬어 정리한다’는 뜻. ‘격몽요결’의 요약본 정도가 되겠다.
십전총서는 중단됐지만 신문관은 1913년 값이 더 싼 ‘륙젼쇼셜문고(六錢小說文庫)’ 시리즈로 ‘홍길동전’ ‘심청전’ ‘전우치전’ 등 국문소설 10여 종을 발간했다. 이 문고본은 당초무늬로 표지를 장식했고 당초무늬 곳곳에 빨간색 꽃잎을 그려 넣어 화려한 느낌이 들게 했다.
한국 문고본의 전성시대는 1960, 70년대다. 을유문고, 삼중당문고 등이 이 시기를 풍미했다. 을유문고는 정치 사회 경제 철학 역사 예술 과학 분야를 망라했고 삼중당문고는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연이어 펴냈다. 서문문고, 삼성문화문고, 문예문고 등이 문고본의 황금시대를 이뤄 갔다.
1980년대 들어 인기가 식은 문고본은 2000년대 이후 ‘살림지식총서’ ‘책세상문고’ ‘태학산문선’ 등이 출간되면서 인기를 회복하고 있지만 문고본이 출판시장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선진국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외국에서는 1841년 탄생해 100여 년간 5290종을 펴낸 독일의 타우흐니츠문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국의 ‘펭귄문고’, 일본의 이와나미(巖波) 신서가 잘 알려져 있다.
오늘 저녁 퇴근길, 서점에 들러 작은 크기, 알찬 내용, 싼 가격, 연속성의 네 박자를 갖춘 문고본의 매력에 빠져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