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윤곽은 흐려졌으나 소리는 또렷해졌다. 제주의 바다 땅 나무 오름 등이 담긴 화가 강요배의 그림들. 눈부신 금빛 햇살이 물결에 부딪치는 소리, 겨울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 포효하는 바다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화랑(02-720-1524)에서 열리는 강요배의 ‘스침’전. ‘뒤집어진 바다’라는 뜻의 ‘뒈싸진 바당’을 비롯해 ‘섬’과 ‘애월’ 등 예전보다 더 부드럽고 단순해진 22점의 그림이 선보인다. 이런 변화에는 붓 대신 물감을 묻혀 사용한 돌멩이, 솔가지, 구긴 신문지 뭉치 등이 한몫을 했다. 그는 스침의 방법을 통해 나무를, 바다를 그려 나갔다.
전시를 앞두고 서울에 들른 작가는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가 세상의 중심이자 우주의 중심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민중미술 활동을 하다 1992년 귀향한 그는 고향의 자연을 스승이자 벗 삼아 작업에만 몰두해 왔다.
“나뭇가지 하나를 그려 보아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깨달음을 얻지요. 자연은 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양상을 보여 줍니다. 자연에는 정형이 없죠. 우리의 의식이 경직돼 있을 뿐.”
‘답이 없는 그림이 좋다’고 말하는 화가. 그가 선보인 그림은 사실적 자연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와 마음을 투과한 풍경들이다. 관람객들이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림을 봐야 하는 이유다.
한편 3월 1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청작화랑(02-549-3112)에서 열리는 전준엽 개인전에서는 한국적 미감으로 건져 올린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른 물과 초록 대숲을 만날 수 있다. 희망을 상징하는 ‘빛의 시리즈’가 주요 테마. 둥근 달과 초가집이 있는 ‘월행’과 낚시하는 사람과 대숲이 어우러진 ‘대바람 소리’ 등 산수화의 모티브를 활용한 그림들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참여했던 작가는 이제 한국적 그림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풍경 속에는 소리도 향기도 정취도 있다. 서양식의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이해하는 풍경을 그리려 노력했다”고 설명한다.
민화같이 화려한 색감과 절제된 구성의 작품들은 실제 자연이 아닌, 관념 속 풍경을 담고 있다. ‘시원의 어느 마을처럼 적막하게 정지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는 그림’(유석우 ‘미술시대’ 주간)이란 평을 들었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뒤 면도칼로 긁어내는 스크래치 기법을 사용해 화폭에선 생활의 묵은 때가 묻은 장판지처럼 포근한 느낌이 우러나온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