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29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시민들은 사흘 전의 서울시민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오후 8시 반경 오페라극장 ‘라 페니체’(불사조·영어로는 피닉스)에 불이 났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진 뒤 시민들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재는 순찰 중이던 경찰이 건물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고 소방서에 신고하면서 알려졌다.
베네치아도 울었다
페니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베네치아의 보물이었다. 베르디의 에르나니(1844년), 리골레토(1851년), 라 트라비아타(1853년) 등 걸작들이 최초로 공연된 세계 오페라 무대의 지존(至尊)이었다. 마리아 칼라스, 레나타 테발디, 엔리코 카루소,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이 그곳에서 세계 정상의 성악가로 성장했다.
즉각 소방대가 출동했으나 극장 근처 운하엔 물이 없었다. 베네치아 시 당국이 운하 보수와 준설작업을 하느라 물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소방대원들이 멀리 떨어진 운하에서 물을 끌어오느라 안간힘을 쓰는 사이 불길은 점점 거세졌다. 페니체도 숭례문처럼 목조 건물이었다.
수많은 시민이 몰려들어 발을 동동 굴렀다. 엉엉 우는 사람도 많았다. TV로 불타는 숭례문을 지켜보며 조기 진화를 빌었던 우리 국민처럼 이탈리아 국민도 한마음으로 불길이 잡히기를 기원했다. 파리에서 프랑스 TV를 보던 필자도 이탈리아 국민의 안타까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소방헬기가 물을 퍼붓자 잦아든 것처럼 보이던 불길이 자정 무렵 지붕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마침내 0시 50분경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불은 9시간 동안 타올랐다. 극장의 전면은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내부는 잿더미로 변했다.
날이 밝자 더 많은 시민이 화재현장에 모였다. 베네치아의 상징이자 영혼을 잃었다며 추모의 마음을 담아 꽃을 바치고 글을 남겼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듯 며칠 동안 70여만 명의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어제와 오늘 숭례문 주변 모습도 비슷하다. 많은 시민이 매캐한 불내가 여전한 가운데 숯덩이로 변한 국보 1호의 비운(悲運)을 슬퍼하고 있다.
페니체도 숭례문처럼 방화로 희생됐다. 보수공사를 맡은 건설회사가 작업 일정을 맞추지 못한 전기 기사들에게 벌금을 물린 게 화근이었다. 2명의 전기 기사가 화재 때문에 공사가 늦어졌다고 핑계를 대기 위해 합선으로 꾸며 불을 질렀다. 범인들은 반년이 넘는 수사 끝에 체포됐다.
페니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불 때문이다. 페니체는 1774년 화재로 사라진 오페라극장 산 베네데토를 대신해 1792년에 문을 열었다. 화재 뒤에 더 아름다운 극장이 탄생했다 해서 불사조라 명명한 것이다. 1836년 또 불이 나 1년 뒤 다시 지었다.
숭례문도 부활할 수 있다
베네치아 시민과 이탈리아 국민은 슬픔에 잠겨 있지만은 않았다. 화재 다음 날부터 재건을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기업과 개인의 정성이 쏟아졌다.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는 나흘 만에 100만 달러가 넘는 성금을 모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외국의 기업과 개인, 유네스코 같은 국제기구도 모금에 동참했다. 파바로티는 “페니체 없는 베네치아는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며 모금공연을 했다.
베네치아 시는 ‘코메라 도베라(원래 모습 그대로 있던 곳에)’를 외치며 완벽한 복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잔해 수습에만 3개월이 걸렸다. 중간에 시공회사가 바뀌는 진통을 겪은 끝에 7년이 지나 새 극장이 완공됐다. 2003년 12월 14일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는 콘서트로 베네치아 불사조는 부활했다. 비슷한 운명의 숭례문 또한 불사조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숭례문을 불사조로 부활시키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