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근한 얼굴로 인기 급상승
“전 조각 같은 몸매도, 예쁜 얼굴도 아니죠. 하지만 보면 볼수록 친근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어요. 그게 장점이랍니다. 그래서 온라인 모델이 되고자 이렇게….”
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스튜디오.
오토바이와 인형이 놓인 무대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는 10명의 지원자. 한쪽에서는 한 지원자가 진지하게 면담을 하고 있고 그 옆에서는 “제 특기가 브레이크댄싱입니다”라며 한 남자가 강렬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곳은 인터넷 쇼핑몰 ‘G마켓’의 온라인 패션모델 선발대회 현장. 화려한 조명도, 길게 뻗은 ‘런웨이’도 없지만 지원자들은 저마다 모델이 되기 위해 포즈를 취하며 뽐내고 있다.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주부 허지아(33) 씨의 얼굴엔 좀처럼 긴장감이 가시지 않았다. 열 살, 네 살짜리 두 아이를 둔 허 씨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날 아침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올라왔다. 이유는 단 하나, 온라인 모델이 되기 위해서다.
허 씨는 어릴 적부터 모델이 되고 싶었지만 이른 나이에 결혼해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라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가 다시 꿈을 펼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인터넷 주부모델 동호회인 ‘주부모델 리스트’에 가입하면서부터다.
비슷한 또래 주부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온라인 모델의 꿈을 키웠던 허 씨는 “오프라인 모델은 나이나 몸매 등 조건이 까다롭지만, 온라인은 뚱뚱한 사람도 모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 무뚝뚝한 패션쇼 모델? 친근한 온라인 모델 납시오!
또 다른 지원자인 김유하(26·여) 씨는 경력이 화려했다.
얼마 전 한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참가한 김 씨는 최종 선발자 5명 중 한 명으로 뽑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키(170cm)가 작아 떨어졌다고 한다. 김 씨가 새롭게 길을 찾은 것은 바로 온라인 모델이었다. 그는 “패션몰이 다양해 키가 작든 크든 자신의 스타일과 맞는 곳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고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 클라우디아 시퍼, 나오미 캠벨 같은 세계적인 슈퍼모델을 비롯해 이소라, 박둘선, 한혜진, 혜박 등 국내 유명 모델까지….
그러나 이제는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패션쇼 런웨이가 아닌 모니터 속에서 활동 중인 이들, 이른바 ‘온라인 모델’이 주목을 받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인터넷 패션 관련 쇼핑몰에서 거래되는 금액은 약 2조3180억 원으로 5년 전 3758억 원에 비해 7배 가까이로 늘었다. 이제 온라인 패션몰을 ‘그들만의 잔치’라 보기엔 이미 ‘매머드’급이 돼 버린 것이다.
G마켓 패션운영팀 권오열 팀장은 “과거 온라인 패션몰들이 싼 가격을 무기로 서로 경쟁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경쟁력이 생기지 않자 인기 온라인 모델을 경쟁적으로 섭외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모델의 수준은 이미 과거 신체 부분 ‘피팅 모델’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패션몰 ‘빌리윌리’에서 1년째 활동하고 있는 여성 모델 이자민 씨는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까지 두고 있을 정도다. 한 번 촬영할 때마다 평균 20벌 정도의 옷을 입어야 하는 이 씨는 촬영일 아침부터 메이크업을 해 꼬박 하루를 촬영한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온라인 모델 활동을 했다는 패션몰 ‘스타일홀릭’의 고등학생 모델 홍영기(16·여) 양은 현재 팬클럽 회원만 300명이 넘을 정도로 ‘이 바닥’에선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다. 3년 전 인터넷에서 ‘얼짱’으로 유명세를 탔고 수십 곳의 인터넷 쇼핑몰 관계자에게서 ‘쪽지’로 모델 제의를 받았다. 홍 양은 “키가 148cm밖에 되지 않지만 옷의 느낌만 잘 살릴 수 있다면 나처럼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추구하는 콘셉트는 이른바 ‘파파라치 컷’.
옷 판매가 주목적인 만큼 일상생활을 하는 듯 자연스럽게 찍어야 한다. 패션몰 ‘디그’의 여성모델 문아랑(22) 씨는 “패션쇼장의 오프라인 모델이 입체적이라면 온라인 모델은 평면적이라 사진 한 장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비율이다. 얼굴이 작을수록, 선명할수록 몸값은 뛴다. 반면 신체 조건은 오프라인에 비해 다소 여유롭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선호되는 스타일은 남성의 경우 170∼175cm에 60∼65kg, 여성은 165∼170cm에 50∼55kg이다.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 연봉 받는 온라인 모델… 해외 촬영까지
이전까지만 해도 쇼핑몰 주인이 직접 입어 찍는 ‘셀프 컷’이나 주변 친구들과 아무렇게나 찍은 ‘친구 컷’, 마네킹에 옷을 입힌 ‘마네킹 컷’ 등 제품의 비주얼은 ‘논외’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이미지와 다르다”며 소비자들이 환불을 요구하는 사례가 생겼다. 또 쇼핑몰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다른 쇼핑몰과 차별화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널리 퍼진 것. 자연스레 제품을 알리는 사진 한 장에도 돈을 투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인기 모델을 섭외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예 해외로 화보 촬영을 떠나는 패션몰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여름부터 해외에 나간다는 ‘빌리윌리’의 차은진 MD는 “괌을 시작으로 프랑스 파리, 체코 프라하까지 가서 찍었다”며 “10여 명의 스태프와 한 번 나갈 때마다 500만∼1000만 원의 비용이 들지만 이전보다 매출이 150%나 늘었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모델 캐스팅도 모니터 안으로 옮겨졌다. 온라인 모델 캐스팅 담당자들은 ‘얼짱’ 소리를 듣는 인터넷 스타들의 블로그나 미니 홈피를 찾아 명함 대신 ‘쪽지’로 캐스팅 제안 의사를 남긴다.
온라인 모델을 하려는 지원자가 몰리면서 몸값 체계도 달라졌다. 과거만 해도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시간당 2만∼10만 원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전속 계약이 일반화돼 ‘연봉’을 받는 모델이 늘고 있다. 쇼핑몰 ‘로티’의 여성 전속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양혜원(24) 씨는 데뷔 초만 해도 시간급이었지만 지금은 2000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다.
전속 계약을 하지 않더라도 여러 쇼핑몰을 넘나드는 ‘프리랜서’ 모델들도 있다. 쇼핑몰 3곳에서 활동 중인 여성모델 송현화(26) 씨는 1주일 평균 5일간 150벌의 옷을 갈아입으며 하루 30만 원 정도를 받는다.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영대 기자
● 패션의 대중화 vs 평생 직업은 글쎄…
온라인 모델의 인기에 대해 전문가들은 디지털 문화와 패션이 맞물리며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을 찍는 ‘셀카(셀프 카메라)’ 문화가 확산됐고, 모델 못지않은 예쁜 포즈를 스스로 개발하는 등 자신을 뽐내는 일이 하나의 놀이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는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 1인 미디어의 발달과 맞물리며 마치 ‘만인 모델’ 시대가 된 듯 확산되고 있다.
서강대 전상진(사회학) 교수는 “패션쇼나 쇼핑매장 등에 한정됐던 오프라인 패션 문화와 달리 온라인 패션 문화는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하고 전파 속도 역시 동시다발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온라인 패션 문화의 이미지도 바꾸고 있다. 패션 컨설팅회사 ‘인터패션 플래닝’의 한선희 부장은 “쇼핑몰 초창기만 해도 가벼운 이미지였던 온라인 쇼핑몰이 정식 유통으로 인정받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미지를 고급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며 “쇼핑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급스러운 모델을 경쟁하듯 섭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가 대중화된 만큼 온라인 모델이 직업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지는 의문이다. 인기를 얻는 것과 직업 자체로서의 ‘인정’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패션몰 ‘안단테’의 성광국 팀장은 “정확한 계약 체계가 성립되지 않고 구두 계약이 많아 모델 이직률이 높다”며 “하루 수십 개씩 온라인 패션몰이 생겨나는 만큼 문 닫는 곳도 수십 곳에 달해 아직은 전반적으로 불안정하다”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