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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체 반품족’ 때문에 멀쩡한 옷 ‘땡처리’

입력 | 2008-02-17 16:05:00

속칭 ‘땡처리’ 시장이 벌어진 한 지방 행사장. 이런 곳에서 팔리는 제품의 상당 수가 멀쩡하게 반품된 상품이라는게 유통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인터넷, 홈쇼핑 등에서 물건을 구입한 뒤 잠시 필요한 용도로 사용하고 다시 환불하는 이른바 '반품족'이 갈수록 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반품족이 가장 즐겨 주문하는 품목은 의류로 업체와 품목에 따라 반품률이 최고 30%에 달한다. 식품 가전 등의 반품률 2~5%와 대조된다.

반품족이 느는 이유는 유통업체간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반품이나 환불할 때 이유를 물어보는 업체가 갈수록 줄고 있기 때문.

이유를 묻는 과정에서 소비자가 기분이 상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반품이나 환불을 거부했다가 입소문이 퍼질 경우 '문 닫을 각오'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업체들은 사실상 '무조건' 반품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반품된 제품은 유통업체와 제조업체, 관련 금융업체, 소비자에게 각각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통업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최근 A홈쇼핑에서 팔렸다가 반품된 한 여성의류의 유통경로를 추적했다.

●신나는 반품족

주부 A씨(35)는 A홈쇼핑에 자동주문 전화를 건다. TV에서 소개중인 8만9000원 짜리 카디건이 주말 동호회 모임 분위기에 잘 어울릴 것 같아 주문하기로 결심을 한 것.

"주민번호 13자리를 눌러주십시오."

자동응답 안내에 따라 김씨가 버튼을 누르자, 상담원의 PC모니터에 '반품률 높은 고객'이라는 취지의 메시지가 표시된다.

'짙은 브라운 색상인데 마음에 드십니까?' '착용감이 생각하신 것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상담원은 상습 반품고객 응대법에 따라 은근히 주문 철회를 유도한다.

하지만 결국 실패, 옷은 경기도의 한 물류센터와 서울 강서 집하장을 거쳐 2일 뒤, A씨의 목동 집으로 배달된다.

다음주 월요일. 김씨는 A홈쇼핑에 전화를 걸어 환불을 요구한다.

상담원은 "태그를 떼면 반품이 안 된다"며 은근히 까다롭게 굴어본다.

하지만 A씨는 "색상이 TV에서 본 것과 다르다", "입지도 못하는 옷을 집에 놓고만 있으라는 말이냐"며 언성을 높인다.

다음날 택배 직원이 집으로 와 옷을 회수해 물류센터에 다시 넣는다.

제조사 H부띠끄 직원이 차를 몰고 와 물류센터에서 제품을 가져다 다림질을 다시 해 회사 창고에 보관한다.

A씨가 깨끗하게 입었기 때문에 멀쩡했지만 A홈쇼핑과 약속 때문에 이 옷은 1년간 다른 유통경로로 팔지 못한다.

●VAN-택배사 웃고, 유통 카드사 울고

이 과정에서 돈은 어떻게 이동했을까.

A씨가 신용카드로 결제한 8만9000원 전액은 반품과 동시에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A씨가 사용한 신용카드사는 이 과정에서 340원을 지출한다.

카드 결재망(VAN)사업자에게 수수료(170원)를 두 번 냈기 때문. 결재 할 때 한 번, 취소할 때 한 번, 모두 두 번 VAN을 이용한 대가다.

A홈쇼핑은 제조사의 몫을 떼고 옷값의 30%(2만6700원)를 매출로 올렸다가 지운다.

하지만 물건 배송과 회수 때 각각 3000원씩 택배비 6000원을 지출한다.

●'죽고 싶은' 제조사

A씨가 반품한 옷은 1년 뒤, 한 인터넷쇼핑몰 '이월상품 40% 할인 특가전'에 올려진다.

하지만 이번에도 팔리지 못한다. '한 물 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판매에 실패한 H부띠끄는 속칭 '땡처리' 업자를 찾는다.

A씨가 반품한 옷은 땡처리 업자에게 2만원에 넘긴다.

땡처리 업자는 트럭을 몰고 다니며 물건을 파는 '보따리상' K씨에게 2만5000원을 받고 이 옷을 판다.

H부띠끄는 원가 2만3000원에서 단 돈 3000원을 건졌다. 물류비 판매관리비 등을 감안하면 차라리 옷을 안 만드니 만 못한 장사를 했다.

한 달 뒤, 서울의 한 주택가에서 주부 B씨는 "'H부띠끄'옷이 단돈 3만원"이라는 K씨로부터 니트 앙상블을 구입한다. 값을 깎아 2만7000원을 낸다.

B씨는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제품"이라는 K씨의 말을 믿지 않지만 어쨌든 값에 비해 품질이 좋아 보이기 때문에 선뜻 돈을 건넨다.

결국 A씨가 한번 입어봤다는 이유로 카디건은 돌고 돌아 약 3분의 1 값에 B씨의 손에 들어간다.

●"이유 없는 반품이 옷값 올린다"

A홈쇼핑은 "반품족들을 관리 한다고 하지만 경쟁 때문에 물건 판매를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라며 "사실 현행 구조상 유통업체 보다는 제조업체가 피해를 크게 보게 돼 있다"고 털어놓는다.

주부 A씨는 "한 번 입고 말 옷을 돈 주고 사기 아깝다"며 "반품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것은 하나의 '삶의 지혜'"라고 말한다.

주부 B씨는 "가끔 길거리에서 파는 물건 중에도 좋은 게 있다"고 한다.

H부띠끄는 "'땡처리' 물량이 늘면 늘수록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다"며 "제품에 하자가 없는데도 반품되는 옷의 값을 다른 제품의 가격에 반영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한다.

결국 A씨가 환불받은 돈 만큼을 다른 소비자들이 나눠서 내게 하겠다는 것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은 체질상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며 "반품은 결국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